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35. 다시 읽고 깊이 읽기-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김부현(김중순) 2019. 6. 10. 16:57

경제학의 고전이자

부동산으로 밥법이 하는 사람들의 바이블, <진보와 빈곤>

 

지금부터 140여 년 전인 1879년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에 의해 출간된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은 언제 접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사회생활을 하기 전 학창시절 의무감으로 건성건성 접했던 <진보와 빈곤>은 고리타분했고 가슴에 와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강산이 두 번 바뀌어 사회에 물들고 찌들어 부동산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다시 집어든 <진보와 빈곤>은 한층 업그레이드 되어 다가왔고, 자본주의에 발붙이고 있으면서 꾸역꾸역 미뤄두고 있는 숙제처럼 다가왔다.

저자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특권으로부터 나오는 죄악과 비참을 목격하고 나은 사회구조의 가능성을 깊이 생각하고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바친다."고 했지만 저자의 기대와는 달리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다. 굳이 변한 걸 찾자면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는 “사회가 눈부시게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를,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판 당시부터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많은 이상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페리클레스’에 나오는 어부들의 대화다.
“어르신, 물고기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까요?”
“그야 물에서 인간이 사는 것처럼 살지.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고 말이야.”
500년이 지난 오늘도 인간 본성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가진 자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칼날 위를 서슴없이 뛰어간다.

통계청 자료(2017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땅덩어리는 46,968제곱킬로미터이고, 필지 수는 22,172,000, 전체 토지가액은 2740조 4650억원에 이른다. 이 중 민간 토지 소유현황을 보면, 전체 인구의 상위 1% 50만명이 전체 개인토지 55.2%를 소유하고, 이를 상위 10% 500만명으로 확대하면 이들이 97.6%를 가지고 있다. 국민 70%는 평생 땅 1평도 보유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급 외제차 옆에서 종이박스를 이불삼아 잠을 자는 노숙자가 증가하는 건 별다른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우리나라 사람들끼리도 땅따먹기 전쟁 수준인데 그 와중에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땅을 꾸역꾸역 사들이고 있다.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 토지 면적은 243.25제곱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83.9배, 공시지가 기준으로는 30조원이 넘는다. 무덤에 있는 헨리 조지가 통탄할 일이지만 자본주의와 경제규모가 성장할수록 인간은 더 이기적이고 치사해지고 한정된 땅은 몇몇 사람들이 독차지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출신인 김정우 민주당 국회의원은 "우리나라는 OECD국가들과 달리 재산과세에 있어 거래세 비중이 높고 보유세 비중은 낮은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다"면서 "지대가 지나치게 커지면 투기적 성향이 강해져 토지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만큼 토지에 보유세를 부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극히 올바른 방법이지만 갈길은 멀어 보인다.
'헬조선', 헬부동산', '부동산공화국'으로 명명되는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이란 무엇일까?

사회는 진보하고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인권을 넘어 동물권을 논하는 지금, 민주주의가 자리잡아 간다고 자부하는 지금도 땅 만큼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보다 우선시 되고 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국가,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토지는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자본과 신성한 노동을 잠식해 나간다. 자본주의의 요상한 괴물인 자본이라는 추상물이 인간의 욕심이라는 본능과 결합하면서 인간이 만들지 않은 자연물에 불과한 토지는 어느새 부의 상징이자 잠식의 도구로써 힘과 권력을 완성해 나간다. 과연 도덕과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헨리 조지는 산업혁명 이후 공업화와 자본주의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엄청난 물질적 진보가 일어나는데 왜 빈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가

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 것이 <진보와 빈곤>이다. 당시는 물론 21세기에도 물질적 진보가 이루어질수록 빈곤이라는 그림자가 동반되는 이

유는 무엇때문일까?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간극이 커지는 것은 왜일까?


바나나 100개를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주면 바나나 때문에 서로 다투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다르다. 100억 원을 가진다 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1,000억 원을 가진 부자가 부럽기 때문이다. 1,000억 원을 손에 쥐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1조 원을 가진 재벌에 비하면 자신은 턱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000억 원이나 1조 원이나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결코 경쟁을 멈추지 않는다. 땅 100평을 가지면 200평을 가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물욕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물욕을 원한다. 안타깝지만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지위를 얻는다해서 반드시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까지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암튼 인간의 물욕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부동산이다.  수천 억원의 부동산을 가져도 더 높은, 더 비싼 빌딩을 원한다.

물론 개인의 능력의 차이와 기회의 활용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산활동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토지를 차지
하는 것을 합법화한 토지의 사유제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는한 토지사유화를 불법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토지사유화가 주
된 가치인 자본주의에서 지대수익을 합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신 토지로 인한 지대수입을 정부가 더 많이 환수하는 것이 유일한 대
안으로 보여진다.

…… 비교적 살기가 괜찮은 사람들은 대중의 빈곤과 고통이 근면, 검약, 지적 능력 등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러한 믿음은 바로 사회적 책임감도 완화시켜 주고 자신의 우월감도 맛보게 준다. 이 믿음은 미국과 같이 만인이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에 역사가 오래지 않아 계층 문화가 가문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널리 퍼져 있고, 역사가 길어 계층을 구분하는

계가 길고 뚜렷한 국가에서보다 정도가 심하다. 자신의 유족한 생활이 고도의 근면과 검약을 기초로 시작하여 고도의 지적 능력에 의해

여러 가지 기회를 이용한 결과로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은 이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리나라 햄버거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맥도날드는 요식업 사업이 아니라 부동산 사업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햄버거를 팔아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땅을 사들여 돈을 쓸어담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을 지대 없는 토지에 투입하여 얻을 수 있는 대가 이상의 생산은 모두 지대로 토지소유자에게 귀속된다면, 결국 노동과 자본이 요구할 수 있는 대가도 지대 없는 토지에서의 생산액에 불과하게 된다. (.......)  토지가치가 생산력보다 더 높은 비율로 상승하면 지대가 그 증가분 이상을 흡수해버리며,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이 훨신 더 많아지더라도 임금과 이자는 하락한다."는 <진보와 빈곤>의 책 내용, '지대법칙'에 충실한 듯 보인다.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사업은 미국을 넘어 세계 곳곳의 땅을 사들여 그곳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판다. 정확히는, 맥도날드가 산 땅에서 가맹점주가 팔게 한다. (물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매입하지 않고 임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맥도날드 햄버거는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기 때문에 대체로 잘 팔리며 초기에는 동업자 즉 프랜차이즈 점장들에게도 돌아간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대가 그 증가분을 흡수하며, 임금과 이자는 가장 열등한 토지 혹은지대가 없는 토지에서의 생산액 혹은 그 가치에 수렴하게 된다.맥도날드의 고객이 햄버거를 사는 소비자가 아닌 프랜차이즈 점주라는 말이 이 말이다풍요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빈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악은 정의를 부정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 준 땅을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정의의 기본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촌의 안목으로 보면 정의는 자본주의의 최상위 법칙이기 때문이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순간 이들 권리도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토지는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베푼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애써 무시해 욌다. 그리하여 물질적 으로 풍요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거지는 더 많아지고 역 근처에서 종이박스로 잠을 자는 노숙자는 더 많아지고 있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떠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여기서 정치가는 선동꾼 역할을 자처한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사유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다고 그가 토지공유제를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다토지사유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그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제3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다. 토지는 공유하면서 자본은 사유화하여 자본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개인이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현재에 당연시 되고 있는 자본주의 아래서 토지의 사유화는 부의 상징이며 재테크의 수단으로써의 성격을 정당화 시킨다. 그러나 토지를 사유화하게 되면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이나 이자율의 상승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생산과 분배의 원리에서 토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산의 한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대가인 지대선에 따라 임금과 이자의 분배가 나뉘기도 한다. 이러한 토지의 절대력을 통한 폐해를 없애고자 그는 지공주의를 기초로 지대조세제(land value taxation)의 개념을 도입한다. 지대조세제는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가치인 지대를 정부가 환수하는 것을 말한다

지공주의를 도입하여 토지를 공유화함으로써 형평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자본은 사유화된 상태로 놓아둠으로써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토지의 사유로 인하여 심각해진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을뿐만 아니라 투기 또한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의 사유화가 합법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도입은 현실적으로 저항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반영한 대표적인 정책이 종합부동산세이다. 일정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누진세율을 적용하여 재산세 이외에 추가로 부담하는 과세이다. 처음 이 정책이 도입될 때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적용 대상과 범위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추가적으로 토지를 계속 늘려나갈 것이라는 의사를 보이기 때문에, 즉 투기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종합부동산세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토지는 태초부터 인간의 창조물이 이나기 때문에 토지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결국 불로소득임은 부정할 수 없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로크는 부동산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땅이 누구의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 나 자신이 땀 흘려 노력해 얻은 성과물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일 뿐,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공기를 내 것과 네 것으로 가리는 일이 황당하듯 땅을 둘러싼 다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실 땅이 개인의 소유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땅은 국가의 것으로 하고 있다.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땅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 ‘토지공개념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은 했지만 저변의 생각은 같다.

얼마 전, 정부개헌안에 토지공개념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려하자 일부에서 공산주의 하자는 거냐!’며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갈수록 토지공개념은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유재산을 헌법 가치로 내세우는 자본주의에서도 땅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개입은 한층 강화되어야 하고 강화될 것이다. 개인의 탐욕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스스로 절제할 줄 모른다. 절제하는 척(?) 연기를 할 뿐이다. 도덕적인 척(?) 위장할 뿐이다. 굳이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하는 책을 보라. 스스로 절제가 가능하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세상에는 결국 힘센 기업 몇 개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현실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모두가 평등하며 필요한 만큼 쓰고 능력만큼 일하는 사회를 꿈꾸었는데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땅이 왜 개인의 소유가 된 것일까? 인간의 얄팍한 이기심 때문이다.

개인의 땅은 남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 주인은 땅을 잘 가꾸어 요긴하게 쓸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이 쓰는 땅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소유가 불분명해서 무엇을 하려 해도 다툼이 생길 것이다. 왜 당신 혼자만 쓰려고 하느냐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이다. 소유가 불분명한 부동산들은 대부분 관리가 잘 되지 않아 거칠고 황폐한 모습으로 바뀐다. 부동산은 소유주가 분명해야 제대로 관리되고 이용된다.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성장할수록 땅값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도시도 부동산 급등에 따른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헨리 조지의 가치가 실현되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언제까지 부동산을 가진 자들을 손가락질 할 것인가? 시장이 미치면 도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같이 미쳐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부동산시장은 다주택자나 기득권층, 투기꾼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실수요자들도 당장 직면한 문제다.

1명의 땅부자를 위해서는 10,000명의 거지가 필요한 세상이다.

몸도 마음도 헐렁한 주말, 하루 종일 방바닥에 엑스레이를 찍다 저녁무렵 TV를 켠다. 황금시간대를 점령한 연예오락프로그램의 주 내용은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프로그램이다. 무수한 출연자들을 탈락시키면서 한 명의 최종 승자를 가린다. 오락프로그램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대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단 한 명의 영웅을 위해 99명의 탈락자들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무
한경쟁시대가 빚은 안타까운 풍경이다. 부동산시장 풍경도 다르지 않다. 최근 정부의 압박이 계속되자 겉으로는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부자들 중 80% 이상이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다. 소위 ‘알부자’일수록 비중은 더 높아진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8 한국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우리나라 부자들의 총자산 구성비는 부동산이 53.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구성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을 왜 하는가. 결국 더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특히나 인구 밀도가 세계 3위인 우리나라에서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가히 전쟁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부동산시장이 미쳐 있었다. 시장이 미치면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같이 미치는 게 현명하다. 부동산은 더 이상 부자나 투기꾼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불로소득도 아니다. 부동산과 담을 쌓은 채 돈만 밝히는 부자라고 욕해 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부동산투기꾼이 판치는 ‘헬한국’, ‘헬부동산’이라고 손가락질해 봐야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억울하면 ○○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