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34. 다시 읽고 깊이 읽기-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김부현(김중순) 2018. 5. 8. 10:16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스 코스 기적을 만들다(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 프로그램)


얼 쇼리스 저자 소개
소외계층을 위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자이다. (....) 이 책에는 그의 생각과 삶의 결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그의 배려와 열정, 놀라운 실천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클레멘트의 기적은 결코 기적처럼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문학이 더 필요하다고. 저자가 보기에 빈민들이 겪는 박탈감은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빈민들에겐 그저 재활 교육이나 직업과 관련한 공부만 시켜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어설픈 동정심이나 감상적 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 박탈당한 것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다.


따라서 한 번도 지적 풍요로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늘 충동에 내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범죄와 마약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해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빈민운동이란 빈민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탐색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당당하게 정치적이고 공적인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적 모델이자 가능성을 그리스의 폴리스 정치에서 찾았다. 그때는 시민이 곧 철학자인 시대였다. 그때 시민들, 곧 자유인들은 직업도 없고 가난했을지언정, "먹고 자는 것에 매이지 않고, 공론을 자유롭게 논하는 것, 공적인 일에 자기 덕을 과시하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 얼 쇼리스에 따르면, "폴리스의 경이로움은 대화 속에, 그리고 언제나 공적인 삶, 행동하는 삶 속에 존재했다.  


그리하여 빈민들에게 재활 교육도 아니고, 사회의식화를 위한 시사평론도 아닌, 그리스 고전을 가르치는 코스를 개설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비범함은 인간이 예술, 문학, 수사학, 철학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으로 자신의 인간됨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재창조했다는 데 있다. 바로 그 재창조의 순간에, 고립됐던 개인적 생활이 끝나고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인문학 관련 책들을 읽으면 얼 쇼리스에 대해, 그리고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언급이 가끔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과 꿈을 찾아주려고 했다<희망의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문학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만든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내용이다


책 속으로

요즘 인문학과 공적 삶(public life)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주장이 옳다면 '철학자-시민'의 탄생과 아테네의 인문학 부흥이 같은 시기에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그저 '우연의 논리'밖에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지속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되물어보자. 아테네 이전의 국가들 중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 민주주의를 낸 나라가 있었냐고. 인문학이라는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27)

하지만 포위해 들어오는 무력들은 빈민이라는 전체 집단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개개인에게 영향을 준다. 심지어 빈민들의 가족 단위로 포위하는 것도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포위해 들어온다. 포위망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렇게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력의 무게는 발밑에 깔린 유리잔처럼 빈민 집단을 산산조각 내고, 가족, 지역사회, 사회 조직의 파편들을 무기력한 개인 생활로 몰아냄으로써 그들을 분열시킨다.(94)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에 끼치는 조합의 영향은 노동 그 자체가 왜 빈곤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우선 정치적인 조직화이며 그 다음으로 경제적인 조직이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정치적 근간이 없다면 단체협상을 수행할 수 없다. 사람들을 정치적 조직과정으로 인도하는 것이 대부분 경제적 문제이기는 하지만, 단체 협상을 집단 없이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은 현대 미국 사회의 노동윤리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노동윤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노동도, 그리고 그 일을 혼자 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아니면 이중적 노동시장의 맨 밑바닥에 놓여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있어 노동이란 꽉 막히 포위망 속에 있는 또 하나의 강제력이 불과한 것인가? 지금 유행하고 있는 '노동 그 자체'라는 가치이론은 가난한 이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이 이론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멋대로 구는 가난한 무리들에게 꼭 필요한 강제적 수단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15)


킹 목사는 흑인들 또는 그 문제와 관련된 모든 가난한 이들을 결함 있는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 킹 목사가 볼 때는 가나한 이들보다는 당대의 광범위한 사회에 더 문제가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이 무력의 포위망이 주는 공황상태를 벗어나게 될 경우, 그들이 인종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며,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또 가난한 사람들이 자치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교회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흑인 교회에는 백인들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자신들에게 허용된 세계 안에서 힘 있는 권력을 만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53)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와 정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제치려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 간의 차이가 제거돼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를 작동하는 '게임의 법칙'(사실 이것은 미국의 탄생과 함께 미국 사회를 지배해온 사회 작동 기제이다.)은 평등과 동등한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174)


그러나 가난의 대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부자들과 비교해서 인문학을 공부할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트주의자들의 그러한 '선험적'주장은 사실 단 한번도 제대로 검증받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엘리트주의자들의 '충고'때문에 빈민들은 인문학을 공부할 기회를 차단당했고, 그 결과 정치적 삶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효과적인 길을 봉쇄당한 것이다 부든 빈곤이든 그 어느 것도 좀더 인간적인 삶을 누리는 것을 방해할 수 없으며 학생의 경제적 상황은 인문학 공부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감성과 지성이다.(199)

 

목동에서 벗어나라

  

우리나라 교육을 지배해온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이다.

삶을 성찰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만들기보다는 시키는 일만 잘 할 수 있는 기술적인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목장은 부자들이 만들테니 대중들은 소를 잘 키우는 목동이 되라는 것이다.

문사철이라 불리는 문학,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은 부자들이 할테니 목동들은 영어, 수학, 기술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산업화를 지나 민주화 시대라고 자부하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를 양분하는 게임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이를 일컬어 목동게임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문학을 모르면 이 게임의 법칙에서 헤어날 수 없다.

목장주인 부자들은 가난한 목동들을 기술적으로 잘 훈련시켜 계속 순종적인 사람이 되게 묶어 놓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불리한 게임의 법칙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난할수록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산업화 시대에는 한 가지 기술만 가지고도 먹고 살 수 있었다. 이제 좁고 깊은 한 우물보다는 넓고 깊은 우물이 필요하다. 부분적 확실성보다는 전체적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절실하다. 부자들의 힘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소위 명문대를 나와 우수한 목동이라 불리는 사람일수록 부자들과 빌붙어 가난한 목동들을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값싼 노동력이나 제공하며 목장주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고약한 엘리트 목동들이 더 큰 힘을 갖는 아이러니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저자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성찰이라고 주장했다.

   

법전이나 경제학원론 수십 권의 무게보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훨씬 묵직하다. 월급올리는 데 혈안이 되기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더 시급하다. 인문학은 수학공식처럼 구체적인 해법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거기에서 빵을 얻거나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외면한다우리는 누구나 일과 삶의 조화를 꿈쑨다. 그런 건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는 체념부터 버려야 한다. 인문학은 결국 자기를 발견하는 길고 긴 여정이라는 다소 시적인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