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33. 다시 읽고 깊이 읽기-김중순의 <마키아벨리처럼 출근하고 공자처럼 퇴근하라>

김부현(김중순) 2018. 5. 5. 10:47

<마키아벨리처럼 출근하고 공자처럼 퇴근하라>




<마키아벨리처럼 출근하고 공자처럼 퇴근하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일종의 재해석이다. 500여년 전 씌어진 <군주론>은 <한비자>의 법가사상과 <순자>의 성악설에 토대를 둔 인간정신의 내면을 파헤친 인간본성에 대한 접근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도 인간본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학교 문을 나선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자보다 마키아벨리에게 더 끌린다. 직장짬밥과 삶의 경험치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조직에 첫 발을 들여놓는 새내기들도 공통적으로 겪는 통과의례일지 모른다.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죽는 계급은 신임 소위라고 한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곧이곧대로 하기 때문이다.

조직에서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하려다보면 돌부리에 걸려 자주 넘어지기 일쑤다. 학교교과서가 조직에서는 딱딱 들어맞지 않는다.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와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다.


협력과 참여를 외치지만 경쟁과 권력으로 대별되는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만 뜨면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세계 역사를 바꾼 것은 힘과 무력이었다. 마키아벨리즘을 옛날 르네상스시대 때 어떤 이상한 놈이 한 말로 터부시해서는 곤란하다. 유능한 리더가 되려면 유토피아 같은 이상적 도덕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현실을 반영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공적인 리더로서의 역할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마키아벨리즘을 찬양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자체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간의 본성이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나 21세기 대한민국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결국 <군주론>의 진정한 가치는 독존이 아니라 공존에 있으며, 사익이 아닌 공익의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인간은 다정하게 대하지 말고 아주 짓밟아 뭉개라

 

인간은 다정하게 대해주기보다는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를 줄 때는 복수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크게 주어야 한다. <군주론> 3


이 대목은 <군주론>에서 뜨거운 감자다. 늘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곧이곧대로 읽으면 마치 마키아벨리가 선한 약자를 괴롭히는 파렴치한 악당처럼 보일 수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군주론> 곳곳에 이와 유사한 비도덕적인 구절들이 등장하는데 글자 그 자체로 읽을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수고로움을 더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명언 몇 줄로 마키아벨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서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인생은 매일이 형벌이라고 했다. 인생을 자세히 보라. 인생은 곳곳에 형벌을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대는 이른바 행복한 사람인가? 그런데 그대는 매일 슬프다. 날마다 그날의 큰 슬픔이 있고, 또는 작은 걱정이 있다. 어제는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의 건강 때문에 떨었고, 오늘은 그대 자기 건강 때문에 근심한다. 내일은 금전상의 불안이고, 모레는 중상자의 험구, 글피는 친구의 불행. 다음에는 날씨, 그다음엔 뭔지 깨졌거나 분실한 것, 그다음엔 양심과 척추에서 책망을 받는 쾌락, 훗날은 세상사의 추이. 마음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등등. 하나의 구름이 걷히면 또 하나의 구름이 다시 생겨난다. 백 날에 하루인들 온전한 기쁨과 온전한 햇빛을 얻기는 어렵다.”



 리더는 도덕 선생이 아니다

 

군주가 여러 훌륭한 성품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군주도 인간인지라 모든 성품을 갖추기는 어렵다. 따라서 나쁜 평판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러 사례를 보면 미덕으로 보이는 일을 해도 파멸하는 경우가 있고, 악덕으로 보이는 일을 해도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사에 도덕을 내세우는 사람은 악인들에게 당한다. 그래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도 안 되며, 악인이 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군주론> 15장 



인간이란 부모의 죽음보다 재산에 더 관심이 많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미움을 받지 않고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은 군주가 백성과 신하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가능하다. 따라서 그 어떤 때에도 백성의 재산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상의 손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주론> 17장   

 

이 부분 역시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구절 중 하나다. “인간이란 부모·형제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자기 재산상 손해는 좀처럼 잊지 못한다.”라는 인간 불신의 속성을 통렬하게 지적한 문장이다. 부모·형제가 죽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만 자기의 재산상 손해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시청률 좀 나온다 하는 드라마의 단골 메뉴들도 이를 증명한다. 부모의 죽음보다 부모가 남긴 재산을 두고 불꽃 튀는 소송전을 벌인다.

마키아벨리가 인간 본성을 보는 시각은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이 도덕을 앞세워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당시 종교계의 눈 밖에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군주론>은 원래 약자의 처지에서 약자를 위한 책이었지만 <군주론>의 가공할 만한 가치를 알아본 당시 권력자들이 약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려고 방송이나 신문을 총동원하여 마키아벨리를 천하의 몹쓸 놈’ ‘사악한 놈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몹쓸 놈으로 홍보하면서도 자기들은 골방에 처박혀 몰래몰래 <군주론>을 탐독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권력자들의 눈에 비친 <군주론>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동시에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치졸함과 얄팍함을 만천하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상이 아닌 어떠한 목적을 위해 싸울 때의 인간상을 지적한 것이다. 자비로 인한 혼란보다는 잔인함으로 말미암은 질서가 낫다는 공공선을 강조한 것이다. ,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지만 경영자로서는 때로 비도덕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칼을 든 강도와 맞닥뜨렸을 때에는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칼을 든 놈에게 도덕책을 들먹이는 것은 하책이다. 리더의 가장 큰 책무는 도덕을 전파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조직의 생존과 번영을 이끄는 장수다.


잔인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마라

 

군주가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관대함이라는 미덕을 정직하게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라면 인색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들은 모두 인색하다는 평판을 들었으며, 그렇지 않은 군주들은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주론> 16

 

중국 정치학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나라를 다스리는 비결은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균형을 잡는 데 있다는 말이 있다. 정치는 강인하기만 해서도 안 되고 유연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춘추시대 정나라에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던 자산(子産)은 강경과 온건을 잘 구사한 정치가의 표상이다. 그러나 자산도 죽음을 앞두고 자기 후임으로 내정된 심복 자대숙(子大叔)을 불러 이렇게 충고했다.

정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하나는 혹독함이다.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복종하게 하려면 덕이 어지간히 많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혹독함으로 통치하는 편이 낫다. 이 두 가지는 불과 물로 비유할 수 있다. 불은 성질이 격렬하여 활활 타오르면 백성은 겁을 먹는다. 그래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러나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에 백성이 겁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다. 관대한 통치술이란 물과 같아 효과를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엄격한 정치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될 수 있으면 백성으로부터 관대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좋겠지만, 관대한 처신을 통해 통치가 쉽지 않다면 오히려 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지나치게 관대함에 관심을 둘 때 군주는 사치스러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모든 자원을 다 소모해버리게 된다. 관대하다는 명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군주는 결국 과도한 세금과 부정 축재를 위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백성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결국, 군주의 관대함을 유지하여 피해를 당하는 백성은 많고, 이익을 얻는 백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백성의 지지가 생명인 군주에게 사소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백성은 등을 돌리게 된다.


병법에도 장수가 다정하게 반복해서 말하는 건 부하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뜻이고, 상을 남발하는 건 사정이 급해졌다는 뜻이며, 벌을 남발하는 건 상황이 딱하다.”는 반증이라고 했다. 너그러움과 상을 남발하면 조직의 생동감을 유지하기 어렵다. 경영자의 가장 큰 무기는 칼이 아니라 침묵이다. 권력자일수록 침묵은 금이다는 말의 효과는 크다. 힘없는 자의 침묵은 침묵일 뿐이지만, 군주에게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침묵은 말이고 말이 곧 침묵이다. 절대 권력자는 침묵으로 말한다. 긍정도 침묵, 부정도 침묵이다. 상과 벌을 줄 때도 침묵이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해도 좋고 부정으로 해석해도 좋다. 그래서 권력자의 침묵은 무섭다. 실적이 좋지 않은 경영자일수록 말이 많아지고, 능력이 부족한 경영자일수록 월급으로 직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아무리 민주적 리더십이 주목받는 시대라고 떠들어도 법과 제도로 다스린다는 의미상의 변화일 뿐 조직 내 인간을 대하는 근본은 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둘 이상만 모이면 이른바 냄비 속의 게같은 짓을 한다. 게 한 마리를 냄비에 넣고 삶을 때는 뚜껑을 닫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는 유유히 탈출한다. 그러나 여러 마리를 삶을 때는 뚜껑을 덮을 필요가 없다. 게들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용감한 게 한 마리가 냄비 위쪽으로 기어 올라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잽싸게 다른 게들이 힘을 합쳐 탈출하려는 게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져 다시 냄비 속으로 끌어들인다. 같이 죽는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이다.


플라톤의 <공화국 The Republic>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빛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입구에서 깊숙이 이어진 통로 저 안쪽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동굴 거주자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게다가 눈가리개까지 씌워져 있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볼 수 있다. 동굴 위쪽에는 불빛이 타오르고 있다....한 포로가 스스로의 족쇄에서 벗어난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 빛을 향해 눈을 돌린다....모두들 동굴 밖은 춥다며 동굴을 탈출하려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동굴은 우리 모두가 어떤 시점에서 머무르게 되는 장소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굴이라는 안락지대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안락지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위치한 장소에서 뿌리를 내려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자동판매기처럼 일상을 이어간다. 동굴을 벗어나는 것은 변신하는 과정이다. 동굴을 벗어나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동굴거주자들에게 전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은 그것 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하면서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도 길은 멀고, 지옥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탄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어정쩡한 존재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은 심연 위에 걸쳐 놓은 밧줄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며 그 위를 걷는 것도 위험하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며 제자리에 서 있는 것 또한 위험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을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 칭하며, 인간은 비록 몰락해버리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니체가 말한 밧줄은 건너가라고 놓인 것이다. 밧줄 위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밧줄 위에 머물러 집을 짓고 살려고 한다. 건너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최후의 인간 속성이다. 두려워서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다. 바람을 막을 담벼락을 쌓고 밑에 도사린 위험을 보지 않기 위해 방구들을 만들고, 그리고선 안보이니까 안전하다고 믿는다. 스쳐 지나가는 비바람, 아니 갈대를 움직일 정도의 바람만 불어도 추락할 그 가는 밧줄 위에서 말이다.

니체는 최후의 인간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돈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인류를 파괴하는 전쟁이 무엇인지, 지위가 무엇인지 안다. 하나 사랑이 무엇이고 창조가 무엇이고 열망이 무엇이고 별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기 처지에 만족하고, 권위에 굴욕하고, 힘센 자에게 양보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계산에는 무엇보다 앞서고, 그리고는 이를 현명한 처신이라고 자랑하는 게 그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군상이다.

최후의 인간은 마키아벨리의 부도덕한 인간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이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밧줄 위에서 필요에 따라 동물 쪽으로, 때로는 초인 쪽으로 왔다 갔다 줄타기하는 어정쩡한 미완성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짐승과 인간의 성품을 동시에 가져라는 말과 일치한다.
니체는 최후의 인간들의 삶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살기 위해 숨 쉬는 것이 최후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삶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연공서열에 따라 월급을 받는 이른바 철밥통들이 그 전형이다. 그런 삶은 왜소하고 비루한 삶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정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안정된 삶은 그에 따른 만족도 없다. 삶의 실상은 불안정하다. 삶이 불안정한 것은 삶이라는 단어 속에 돈과 권력, 생존이라는 찰거머리 같은 짐승의 가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불만족을 기본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안정과 만족을 버리라고 니체는 고대의 신비주의자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거듭 촉구했다. 그가 외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험하게 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이란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짐승에게, 후자는 인간에게 해당한다.

월급은 찔끔찔끔 올려주고, 해고는 단칼에 하라

 

군주는 가해 행위들은 단번에 실행하고, 은혜는 조금씩 천천히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속해서 저지르는 가해행위는 백성으로 하여금 불안에 떨게 하고 반감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지만, 은혜는 천천히 베풀어야 오랫동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 8

 

사람을 얻으려면 먼저 강함을 보인 후 다가가 손을 잡아야 한다.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게, 포상은 천천히 하는 것이 지배의 기본이다.”라는 영화 <선덕여왕>의 명대사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경영자는 벌은 한 번에, 상은 여러 번 나누어서 주라는 것이다. 상이라 함은 급여, 포상, 표창, 승진, 권한 확대, 호봉 상승 등과 같은, 직원들의 동기 부여적인 모든 요소를 통칭한다. 이런 것들은 천천히, 자주, 조금씩 행하는 것이 좋다. 반면 100명을 해고해야 할 경우가 생겼다면, 10명씩 10번에 걸쳐 행하기보다 한 번에 100명을 모두 해고하는 것이 낫다.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는 전략이다. 이런 구절을 접하면 마키아벨리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조직 나이 두 살만 되면 수긍이 간다.


권력은 도덕보다 비도덕에 가깝다


중국에서는 흔히 황제와 신하 사이의 지위 관계를 (), (), ()’의 세 가지 말로 표현한다. 당대(唐代)까지는 황제와 신하가 똑같이 탁자에 앉아() 정치를 논했는데, 송대(宋代)에 들어서는 신하가 를 허락받지 못하여 선() 채로 황제의 하문에 답했고, 나아가 명대(明代)에 와서는 는커녕 도 인정되지 않아 꿇어앉아() 나랏일을 보고해야 했다. 시대가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더 강해졌다.

세계는 자유와 평등, 도덕과 민주라는 가치를 내세우지만, 시대가 발전할수록 권력은 더 비민주적이고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강화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마키아벨리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군주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를 통해 군주가 백성을 잘 통치하려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라.”고 했던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마키아벨리즘 사상의 강조점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나쁜 수단들을 마구 써도 무방하다에 있는 게 아니라 나쁜 수단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수단을 통해서 좋은 목적을 이루었느냐를 따지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데 있다


아부는 품격 높은 칭찬이다.

아부는 역지사지 정신의 발로다.

아부는 공감이자 배려의 철학이다.

 

<아부지도>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부는 단순히 아첨하는 말의 기술이 아니다. 어떻게 상사를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익을 취하고 해를 피할 수 있는지, 어떻게 판세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지와 같은 일상의 모든 일을 통칭한다.” 이것은 필자가 강조하는 아부=맞춤식 인간관계와 궤를 같이한다. 생각해 보라. 어떤 사안을 두고 사사건건 서로 자기주장만 한다면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상사가 바담 풍이라고 해도 눈치껏 바람 풍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 상황에서 옳고 그름은 별개의 문제다. 조직은 수학 정석이 통하는 곳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오롯이 도덕교과서로 성공스토리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아부는 사람마다 처한 상황을 고려하는 전략적 칭찬이자 맞춤식 인간관계다. 무릎을 꿇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무릎을 꿀릴 수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그 빵 맛을 안다. 물론 꿋꿋한 소신으로 할 말 다하며 목숨을 내놓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역사적 충신들도 있었다. 그런 도덕적 소신을 부정적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고흐와 같은 삶을 살든, 피카소와 같은 삶을 살든 그 어떤 삶도 소중하다.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굳이 마키아벨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부는 이상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술이자 지혜로운 의사 소통기법이다. 아부가 문제가 아니라 아부를 잘 못하는 것이 문제다. 송나라 재상 자한子罕은 군주 송평공宋平公게 이렇게 아부를 했다. “상을 주고 물건을 하사하는 것은 백성이 좋아하는 일이니 왕께서 몸소 하십시오. 죽이고 처벌하는 일은 백성이 싫어하니 제가 맡겠습니다.”       


칭기즈칸에게 야율초재가 없었더라면


나의 부하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

폐하! 두 가지만 약속하여 주신다면 신은 폐하의 충복이 될 것을 하늘과 땅에 맹세합니다."

두 가지? 그래 어떤 요구조건인가?"

폐하! 백성이 피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려주실 수 있습니까?"

천지신명께 약속한다! 그리고 다음 조건은?"

폐하!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을 때 같이 굶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짐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키겠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은 이제부터 폐하의 것이옵니다. 온 힘을 다해 폐하를 보필하겠사옵니다."

 

인류 최초의 부동산 전문가는 칭기즈칸Genghis Khan이 아니었을까. 그는 단기간에 세상에서 가장 큰 땅을 차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렇게 큰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둔재였지만 충직했던 비서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칭기즈칸을 가까이서 보필하여 몽골의 팽창기를 이끈 최고의 전략가다. 당돌한 젊은 인재가 말한 두 가지 조건에 함축된 의미는 백성이 모든 통치의 목적이고 제왕은 이를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칭기즈칸이 실천하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야율초재의 능력을 인정하고 단박에 수용했다.


몽골은 고려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를 닥치는 대로 싹쓸이했다.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오로지 무력만이 살 길이요 천하를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던 칭기즈칸에게 야율초재는 높은 문화에 대해 굳건한 관심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몽골이 몽골 자기 문화를 갖지 못한다면 점령한 나라를 온전히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고 직언했다. 요컨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군주가 진정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힘으로 천하를 차지할 수 있으나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조언했다. 임종을 앞둔 칭기즈칸은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가문에 준 인물이니 그의 뜻에 따라 국정을 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칭기즈칸에게 야율초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한낮 골목대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탁월한 전략은 고전에서 탄생했다

 

군주는 역사서를 읽고 위인들의 행적을 연구해야 한다. 그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지휘했는지를 분석하고, 전쟁의 승패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검토하여 역할모델로 삼아 그들이 밟아온 길을 뒤따라야 한다. 그 위대한 인물 역시 그들 이전에,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영광을 누렸던 위대한 인물을 모범 삼아 그 행동과 업적을 항상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주론> 14

 

146953일 새벽 4, 이탈리아 피렌체 외곽 허름한 달동네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 그는 아버지로부터 두 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가난과 고전을 읽는 습관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책 살 돈이 없자 아버지는 책을 구하기 위해 인쇄소에 나가 직접 제본을 하기도 하고 포도주와 책을 맞바꾸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고전에 대한 열정으로 마키아벨리는 인문학이라는 자산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역사서를 읽고 위인들을 모방하라고 조언했는데, 마키아벨리 자신이 이를 가장 잘 실천했다.

<군주론>에는 수많은 역사가 등장한다.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의 역사적 사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역사에 관한 고찰 없이 대충 읽었다가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군주론>은 결코 어려운 고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설프게 베끼면 표절이고 잘 베끼면 창조다


어떤 결과물도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 사람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인간은 결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무언가 실마리가 있어야 그것을 밑천 삼아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뇌 물리학의 법칙이다. 그래서 유율법이라는 미적분 계산법을 만들면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비판을 받은 뉴턴Sir lsaac Newton더 멀리 바라보기 위해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다고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선도자나 개척자가 되라는 말은 아주 멋진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책임한 말이다. 기존의 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것은 독선이고 불통이고 아집이다.



(.....) 이런 일을 당하면 술잔을 기울이기보다는 <권력중독자>라는 책으로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성깔 있는 상사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 직장인에게 권하고 싶다. 1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도 유용할 것이다. 괴팍하고 난폭한 권력에 중독된 상사들의 특징을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기이익을 위해서라면 부하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같이 화를 내고, 강한 자에게는 납작 엎드리고 힘이 없거나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은 무참히 짓밟는다. 아침 식사 때는 아이를, 회사에서는 부하를, 식당에서는 종업원을, 버스에서는 운전사를, 그래도 기운이 남으면 집에 와서 배우자를 괴롭힌다. 이쯤 되면 정신질환 수준이다. 네 발로 기다가 어느 날 두 발로 서게 되자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지만 자화자찬이다. 인간이 되었다고 네발짐승의 원시습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런 막가파식 상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은 속이 뒤틀리지만 첫째도 복종, 둘째도 복종이다. 실수했으면 혼나는 것은 당연하고, 아무 관련 없는 것까지 들추어내어 성질을 부리는 것까지도 묵묵히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라. 앞서 말했듯이 상사와 겨루어 이길 확률은 매우 낮다.


맹자의 <만장하萬章下>에 나오는 유하혜는 임금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잘 섬겼다. 그는 더러운 임금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작은 벼슬이라고 사양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능력을 숨기지 않은 채 반드시 자기 방식대로 하였으며, 벼슬길에서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고,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도 걱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과 함께 있어도 여유작작하며 결코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웃통을 벗거나 벌거벗은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래서 유하혜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속이 좁던 자들이 관대해지고 각박하던 자들이 후덕해지게 되었다. 상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다. 상사를 탓하기보다는 그런 상사를 잘 모시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라.


직장 짬밥 3년 차 정도만 돼도 우리나라의 이름난 산속에 왜 그렇게 많은 절이 있는지 알 것이다. 괴팍한 상사에게 깨져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라고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은 스님의 길이자 고난의 수행 길이다. ‘괴팍하고 불같은 성깔을 가진 사람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지닌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미화되는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니, 고생이다. 명쾌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개탄스럽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희망컨대, 훗날 당신이 리더가 되거든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어느 냇가에 하늘 높이 솟은 떡갈나무가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그 떡갈나무를 부러워했고,

떡갈나무는 "나는 언제나 너희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 내가 가장 강하니까." 하고 마음껏 자랑했다.

어느 날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쳤고, 떡갈나무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태풍이 지나가자 떡갈나무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 있는 갈대를 보았다.

"갈대야, 너는 어떻게 그 무서운 태풍 앞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견뎌냈니?"

"당신은 억지를 쓰니까 그래요. 아무리 당신이 강해도 태풍과 맞서지는 못해요. 나는 언제나 맞서지 않고 고개를 숙이니까 그렇게 거센 태풍에도 상처하나 입지 않고 견딜 수가 있어요."

 

<라퐁텐 우화집Fables de la Fontaine>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직에서도 똑 부러지기보다는 휘는 것이 좋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고개를 숙여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하라. 자존심을 앞세워 땅강아지처럼 밟혀 죽는다면 올바른 처세가 아니다. 병법에도 수에서 밀리면 싸우지 말고 항복하거나 도망가 후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아군이 적군의 10배가 될 때는 포위한다. 5배가 되면 공격한다. 2배가 되면 적군을 나눈다. 수가 비슷하면 열심히 싸우되, 적이 더 많으면 도망가고 그게 아니라면 싸우지 말고 지키기만 한다.” 죽어서 이뤄지는 일이 있다면 그 죽음은 숭고하고 가치가 있다. 지는 싸움에서 도망가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강한 놈을 피하는 것은 결코 치사한 것이 아니다. 힘도 없는 놈이 무턱대고 대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힘이 없다면 힘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다.


세종의 덕치는 칼로 가능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세종은 으로 통치하여 가장 존경받는 왕이다. 세종의 덕치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다. 무력으로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세종의 철학에 많은 신하가 반대했지만, 북방 개척과 두만강의 육진 개척을 완성하였다. 조선 왕 중 유일하게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힌 왕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세종의 덕치는 칼끝에서 나온 것이다. 나라를 평온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데는 튼튼한 군사력이 있었다. 힘이 없는 자가 자유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구나 리더를 꿈꾼다.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을 많이 갖겠다는 의미다. 리더란 단순히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이다. 조금만 고민해보면 기업조직의 뿌리는 십중팔구 군대조직을 모방한 것이다. 조직 나이가 짧을수록 민주적이고 사랑받는 경영자가 성공한다는 도덕론적 논리를 편다. 교과서적 발상이자 학교의 때를 벗지 못했다는 의미다.

조직의 꽃은 권력이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이익이다. 이익 너머의 철학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이상이다. 일을 즐기면 이익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말, 그럴듯해 보이지만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이익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익이 따라온 것이다. 말은 아름답지만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을 놀이처럼 한다는 말, 역시 흘려듣는 것이 좋다. 물론 개인으로서는 가능하지만, 조직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은 일이고 놀이는 놀이다. 일과 놀이가 모호해지는 순간 조직의 위계질서는 무너진다. 이익은 그 속성상 민주적이지는 않다.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밟고 넘어서야 한다. 물론 지금은 전보다 잔무가 줄었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잔무를 할라치면 한 개그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대사가 자꾸 생각나 헛웃음만 켠다.

 

돈 많이 벌면 뭐 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 먹겠지.

소고기 사 먹으면 뭐 하겠노? 힘 좋아서 열심히 일하겠지.

열심히 일하면 뭐 하겠노? 월급 많이 받겠지.

월급 많이 받으면 뭐 하겠노? 기분 좋다고 또 소고기 사 먹겠지.

 

속도 강박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사는 직장인의 자화상 같다. 더 빠르게 뛰어야 하고 더 오래 일해야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더 많이 소고기를 사 먹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을 보낸다.



마키아벨리의 삶과 죽음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가난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만 법률가였지 인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가 메세르라는 법률가 호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법률 관련 유사 자격증을 딴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업인 법률관련 일보다 인문학에 더 관심을 가졌던 터라 어쩌면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가난과 함께 성장했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재에는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전집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 등 여러 고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문학 수준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의 고전사랑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비롯한 수많은 명저들을 남길 수 있었다. 아버지는 두 개의 유산을 마키아벨리에게 물려 준 셈이다. 하나는 가난한 경제적 형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재에 가득 꽂힌 고전이었다.

<군주론>은 약자들이 읽어야 한다. 강자를 위한 책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억울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 약자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약자들을 하수인 취급하는 강자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읽어야 한다. 어느 나라, 어떤 조직 할 것 없이 1%의 강자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99%의 대중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조종당한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99%는 개미투자자들이고, 기관투자자들은 1%에 불과하다. 돈을 따는 것은 1%들이다. 99%의 개미들은 결국 들러리로 전락한다. 99%1%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강자들의 전략을 터부시하며 공부하지 않는 노예근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지적처럼 지나치게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를 봐도 대개의 경우 갑의 행세를 하는 쪽은 1% 정도다. 99%들은 1%를 따른다.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뻔한 투자전략을 맹신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나라를 좌지우지 한 것은 1%의 양반이었고 99%는 상놈과 노예들이었다. 당시 노예들에게는 책을 아예 읽지도 못하게 했다. 지금은 가난해도 책은 맘대로 읽을 수 있다. 약자일수록 마키아벨리를 찾고, 가난한 사림일수록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한 행동은 가난한 정신에서 나온다. 가난한 정신을 극복하는 방법은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르네상스란 다시라는 의미의 Re’'탄생'을 뜻하는 네상스Naissance'가 결합된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와 피렌체가 강대국으로 재진입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권력층들은 무시했다. 피렌체는 망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강자의 횡포에 맞서 싸우려면, 그래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면 총칼이 아닌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악성 댓글이나 욕지기가 아니다. 그러나 99%의 약자들은 좀처럼 고전을 읽지 않는다. 터부시하기까지 한다. 인문고전 대신 기법이나 지식위주의 테크닉독서에 익숙해져 있다. 지금도 고전은 1% 강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1%의 거대자본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인문학자라는 사실이다. 최초의 인문학자는 최고의 경제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인문학이 경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철학·인문학 그 자체에만 매진하는 것은 경제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인문학으로 단련된 두뇌가 경제에 뛰어드는 순간 180도 달라진다. 인문학의 두뇌를 가진 사람이 순식간에 경제를 지배해 버린다. 경제활동이 곧 두뇌활동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경제논리에 집중하고 강자는 인문논리에 집중한다. 약자는 과거에 집중하고, 강자는 미래에 집중한다. 치열한 고전읽기가 되지 않으면 <로마사논고>에서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것처럼 소위 얼빠진 짐승과 같은 신세를 탈피할 수 없다.


대중의 습성은 얼이 빠진 짐승처럼, 사나운 본성을 지니고 숲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리 속에 갇혀 노예처럼 사육되고 있다가, 뜻밖에 자유로워져서 들판에 방목되면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그저 두리번거리다가 누군가가 잡으러 오면 즉시 그 먹잇감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타인의 명령으로 길들여진 대중은 바로 이와 같은 처지다.”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99%의 대중은 얼빠진 무능한 자이며, ‘노예근성에 물들어 1%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나약한 인간인지 모른다. 직급이 낮을수록, 약자일수록 고전을 더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시간이 나서 읽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한다. 건성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읽어야 한다. 인문학은 몸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개조하는 힘든 프로젝트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빌 게이츠Bill Gates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완벽한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라면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지 말고 그러한 세상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하지 않았을까.

 

강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투덜대지 마라.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부당한 짓을 한다고 울분을 토하지 마라.

강자들이 부당한 명령을 내린다고 징징대지 마라.

강자들은 약자들을 위로해줄지언정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역사는 결코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철학이다. 그는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살았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이후 지중해의 중요성은 날로 감소되었고, 조국 피렌체는 경제 및 정치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하며 혼란을 겪고 있었다. 9살 유년기 때는 나폴리 왕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고, 141925살 청년기에는 프랑스 군대가 북쪽에서 밀고 들어와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전쟁의 공포를 두 번이나 경험했지만 탁월한 인문고전 덕분에 젊은 나이에 외교관으로서 고위공직에 진출한다. 외교업무는 물론 곧이어 ‘10인 전쟁위원회서기관을 겸직하면서도 각국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서민 출신이었던 까닭에 결국 대사로 임명되지는 못했다. 동서양의 역사에서 보듯, 확실한 연고도 없고 빽도 없는사람은 결국 정치적인 분쟁과 정략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메디치 가문이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로 다시 등장하자 메디치가와 경쟁 관계였던 파벌의 수장과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쓴 채 모든 공직에서 해임된다. 이어 메디치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자신이 근무했던 시뇨리아 정청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바르젤로 감옥에서 무자비한 날개꺾기Strappado'고문을 여섯 차례나 당했지만 특유의 강직함과 익살로 살아남았다. 1494년부터 1498, 마키아벨리의 나이 25세부터 29세까지 피렌체를 신권정치로 물들였던 사보나롤라는 날개꺾기 고문을 단 두 차례 당하고 자신의 죄를 술술 불 정도로 가혹한 고문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 1512년은 모든 것이 박살나고 처참했던 해였다.

몇 년 전 연합뉴스(2013215일자)에서 ‘500년 만에 마키아벨리 체포령이 발견됐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보도를 인용 보도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스티븐 밀너 교수는 피렌체의 문서보관소에서 1470년부터 1530년 사이에 발표된 피렌체공화국의 포고령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1513년 발표된 이 포고령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구 권위자인 그는 체포령이 내려진 날 마키아벨리는 체포돼 투옥됐으며 나중에 풀려나 시 외곽에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고 설명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또 그가 가택연금에 처했다는 것은 처음 밝혀진 진실이다.

밀너 교수는 "이 문서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의 실추를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매우 흥분됐다"면서 <군주론>은 정치사상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작품으로 '권모술수''악마' 같은 단어들이 모두 이 작품에서 나왔지만 집필 당시의 정황은 종종 간과되곤 했다"고 말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연보



 

구 분

 

주 요 내 용

기 타

1469.05.03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남.

(피렌체 아르노강을 연결하는 베키오 다리 인근 비아 로마나(Via Romana)의 낡은 집에서 출생)

장남

(위로 2명의 누나와 남동생 토토)

1476.05.06

마테오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공부의 첫 단계인 도나텔로(Donatello) 과외

 

1479

아버지 베르나르도 전염병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살아 남.

 

1480.12

피렌체대학에서 마르첼로 아드리아니(Marcello Adriani) 교수에게 인문고전 개인교습

 

1481.11

파올로 다 론시글리온(Paolo da Ronciglione) 학교를 다니기 시작함

 

1481.12

가족들 무젤로(Mugello)로 이사함

 

1482~1497

13~28세까지의 기록은 없음

 

1496.10.11

어머니 바르톨로메아 데 넬리로 사망

 

1498.05.23

4년간 피렌체를 신정정치의 마술로 끌어들였던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화형식을 지켜봄

시뇨리아 광장

1498.05.28

대평의회 투표를 통해 피렌체공화국 외교 담당 2서기장으로 임명됨(기적)

29, 고졸

1498.07

‘10인 전쟁위원회서기관으로 겸직

군사

1498.07.13

이몰라(Imola)와 포를리(Forli)를 통치하고 있던 여걸 카테리나 스포르차(Caterina Sforza)를 만나 용병문제 협의

이탈리아의 잔 다르크라 불림

1498.11

‘10인 전쟁위원회대표로 피옴비노(Piombino)의 통치자에게 파견됨

최초의 외교업무

1499.07

카테리나 스포르차-리아로(Caterina Sforza-Riaro)에게 사신으로 파견됨

 

1500.05.10

아버지 베르나르도 사망

무덤은 산타크로체 성당

1500.07~12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됨.

누이 사망

 

1501.가을

마리에타 코르시니(Marietta Corsini)와 결혼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둠

1501.12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를 수행하여 체세나(Cesena)와 세니갈리아(Senigallia) 방문

 

1503.01.20

체사레 보르자의 진영을 떠나 피렌체로 출발

 

1503.01.23

체사레 보르자의 편견업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

 

1503.04.26

시에나(Siena)의 군주인 판돌포 페트루치(Pandolfo Petrucci)에게 파견됨

 

1503.10~12

교황 율리우스(Julius) 2세의 선출을 참관하고 보고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 방문

 

1504.01~02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게 파견됨

두 번째 파견

1504.07

시에나 군주 판돌포 페트루치에게 파견됨

두 번째 파견

1505.12

마키아벨리가 제안했던 피렌체의 시민군 재건 프로젝트가 잠정적으로 승인됨

 

1506.01

피렌체 북쪽 무겔로(Mugello)에서 시민군 충원 지원 활동

 

1506.02.15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시민군 400명 첫 열병식 개최

 

1506 여름

<보병을 위한 준비>에서 외국 용병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강조

자국군 육성 강조

1506.08~10

로마 교황청에 파견됨

율리우스 2세를 수행하여 비테르보(Viterbo)를 시작으로 오르비에토(Orvieto), 페루자(Perugia), 우르비노(Urbino)를 거쳐 체세나와 이몰라(Imola)에 감

두 번째 파견

1506.12.06

피렌체 9인군사위원회서기관으로 겸직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시민군 창설 의회로부터 공식 승인 받음

용병부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신설된 시민군

1507.01~12

시민군 조직을 위한 모병활동 전개

토스카나 지역

1507.12.07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가 피렌체를 침공하자, 황제를 만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피렌체 출발

 

1508.01.11

막시밀리안 황제를 알현하고 군사비용 추가로 지급하고 피렌체는 위기를 모면함

 

1508.06.16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정에서 복귀

 

1509.05

마키아벨리가 조직하고 훈련시켰던 피렌체 시민군의 활약으로, 15년간 지속되었던 피사와의 전쟁 승리

 

1510.05~10

루이 12세의 궁정에 외교사절로 파견됨

세 번째 파견

1511.09~11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됨

네 번째 파견

1512.08

스페인군대가 피렌체를 공격하여 프라토(Prato)를 약탈함

프라토 전투

1512.09

피렌체공화국 항복.

1494년부터 18년간 지속되었던 피렌체 공화정이 몰락하고 메디치 가문이 다시 집권

피렌체 몰락

1512.11.07

피렌체 제2서기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해임

백수로 전락

1512.11.10

음모설에 연루되어 무죄로 풀려났지만 1년간 피렌체 정부청사 출입금지, 1000피오리노(마키아벨리의 1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의 보석금 납부 선고 받음)

보석금은 친구 셋이 대납

1513.02

()메디치가의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던 22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재판을 받고 투옥. 고문을 당하는 내내 조국에 대한 나의 충성은 나의 가난이 증명하고도 남는다.”라고 하면서 결백을 주장

날개꺾기고문을 6번 당함.

1513.03.11

교황 레오 10세의 특별대사면으로 투옥된 지 22일 만에 출옥

 

1513.04

피렌체 남쪽 허름한 시골 산탄드레아의 농장에 은둔하여 집필활동에 전념

가택연금

1513.07~12

<군주론> 초고 완성

 

1518

루첼라이 정원 모임인 Orti Oricellari(오르티 오르첼라리)’의 정신적 지주로 참여하여 청년들을 가르치고 토론함.

<로마사 논고>를 처음 발표함

플라톤 아카데미의 정신을 계승한 피렌체 지성인들의 학술단체

1517

<로마사론><전술론> 완성

 

1517.03

<군주론> 헌정식을 위해 로렌초 데 메디치를 알현하였으나 그는 끝내 <군주론>을 외면함.

헌정식에 참석한 다른 사람이 선물한 사냥개는 관심을 가짐.

이를 계기로 공직재복귀의 꿈을 접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섬.

절친 베토리의 주선으로 헌정식 개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군주론>

1518

사육제 기간에 희극 <만드라골라(Mandragola)> 집필. 어떤 늙은 판사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유혹하는 내용(마키아벨리 자신과 동네 과부와의 불륜이야기)

<만드라골라>의 인기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옴

 

이탈리아 최고의 코미디로 대박이 남

1518

<로마사논고> 완성 루첼라이 정원 모임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헌정

 

1519

<군주론>의 헌정 대상이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와 <로마사논고> 헌정했던 코시모 루첼라이가 동시에 사망

 

1520.11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피렌체사>집필 의뢰 받음.

<카스루치오 카스트라카니 다루카의 생애(Lavita di Castarcani da Lucca)> 집필

 

1521

<전술론> 출간. 루첼라이 정원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기술

유일하게 마키아벨리 생전에 출간됨

1523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대신해 로마냐 통치자였던 귀차르디니 총독의 개인자문관으로 임명

 

1525.05

<피렌체사> 8권을 완성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헌정하기 위해 로마 방문

교황은 당초 지불키로 한 금액의 두 배를 지불함

1525.09

피렌체 ‘5인 성벽관리위원회서기관장으로 임명.

피렌체 외곽 성곽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설계문제로 마키아벨리와 협의(마키아벨리가 죽고 난 후 피렌체 성곽구축 군사위원회리가 구성되었는데 미켈란젤로가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설계도면도 남김)

피렌체 방어를 위해 신설된 군사조직

1526

<만드라골라> 보완하고 수정함

 

1527.05

귀차르디니 총독의 개인자문관역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옴

 

1527.06.21

58세의 나이로 사망

묘비명 : TANTO NOMINI NULLUM PAR ELOGIUM (No eulogy would be adequate to praise so great a name, 그 어떤 찬사로도 이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고질병인 우울증에 시달리긴 했지만 제2서기장 재출마에 낙선한 것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1527.06.22

천재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 묻힘.(미켈란젤로, 갈릴레이 갈릴레오, 단테의 무덤도 있음)

 

1531

<로마사 논고> 출간, 마키아벨리의 가장 긴 저서이며, 여러 면에서 정치철학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가장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음

 

1532

<군주론><피렌체사> 출간

 

1559

<군주론> 금서 조치됨

교황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