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부동산 재벌이자
부동산 재테크의 달인
"크라수스"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장수 국가였던 로마는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그야말로 돌풍처럼 우리 독서계를 강타했다. 최근에는 그 기세가 예전만 못하지만 오랫동안 인문계의 베스트셀러 대열을 떠나지 않을 만큼 책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본인이지만 로마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비롯하여 국내에 소개된 크라수스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긍정적 평가를 그다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돈 밖에 모르는 악덕 부동산 재벌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년~BC 53년)는 로마 공화정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 : 세 사람이 하는 정치)를 펼친 장본인이다. 크라수스는 부동산은 물론 은광, 노예사업까지 벌여 엄청난 돈을 벌어 돈으로 로마공화정 시대 젊은 정치인들을 매수했을 뿐만 아니라
-사진 : <위키백과>, 크라수스
스파르타쿠스(Spartacus : 노예검투사로 약 2년 동안 노예들을 이끌고 반로마공화정 항쟁을 이끌었다) 반란 진압에도 투자하여 로마를 쥐락펴락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시의 땅 절반을 소유했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가진 크라수스였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바로 전투에서 ‘승전 장군’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를 위해 파르티아지역 카르하이 전투(Battle of Carrhae)에 직접 나서게 된다. 호기롭게 전장에 나섰지만 결과는 치욕스런 참패로 끝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에게 베풀지는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 달성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던 탓에 비록 당대 최고의 부자였지만 존경받지 못한 이유였다. 현대 개념으로 보면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셈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존 캠프너(John Kampfner)가 쓴 <권력위의 권력 슈퍼리치>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돈과 권력을 모두 거머쥔 슈퍼리치들의 족적을 파헤친 책이다. 20여 명이 부를 축적한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데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부동산 초재벌 크라수스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승전을 꿈꾸었던 카르하이 전투가 벌어진 파르티아는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야강(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 인근에 살던 유목민족이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에 세운 나라였다. 그들은 페르시아가 망한 직후에 그 자리에 들어와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아시아와 로마와의 실크무역을 독점했다. 또한 파르티아는 로마가 한나라와 직접 접촉을 못하게 해서 실크 제조술을 로마가 알 수 없게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로마는 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삼두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시저나 폼페이우스와는 달리 전쟁과 별 상관없이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당대 최고 부자였다. 따라서 그는 시저와 폼페이우스에 견줄만한 전투성과를 올리기 위해 원로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감행했다. 주위의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가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이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때 아니나 다를까 여러 가지 악조건에 부딪히게 된다.
"주변에 강한 천둥이 수없이 내리치고 번개가 여러 차례 눈앞에서 번득였다. 그리고 안개와 강풍을 동반한 바람이 불어 뗏목이 산산이 부서졌다. 크라수스가 야영하려고 했던 장소도 세찬 벼락을 두 차례나 맞았고, 호화롭게 장식한 말이 마부를 끌고 난폭하게 강으로 달려가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존 캠프너, <권력 위의 권력 슈퍼리치Super Rich>, p.70.
물론 이외에도 파르티아가 만든 실크로드 무역에서 크라수스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마침내 BC 53년, 파르티아와 로마는 카르하이 전투(지금의 터키 남쪽 하란 지역)를 벌였다. 파르티아는 1만 명의 기마대가 나섰고 로마는 최강의 보병 4만3천명이 나섰다. 결과는 로마의 참패였다. 로마군 2만 명과 함께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까지 전사했으며 포로로 잡힌 로마군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BC 87년 마리우스와 술라가 내전을 벌일 당시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하고 술라파를 숙청하자 크라수스는 아버지와 형을 잃고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젊은 장교였던 크라수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BC 83~82) 술라를 지지했으며, 82년 로마로 돌아와 술라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BC 73년경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BC 72~71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했으나 공적을 폼페이우스에게 빼앗겼다. 그리하여 크라수스는 술라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자들의 재산을 헐 값에 사들여 엄청난 부를 일구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좋지 않았다.
BC 73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하나인 루쿨루스는 폰투스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머물고 있었고 또 한명의 유능한 장군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을 치루느라 히스파니아에 머물고 있었다. 2명의 집정관이 반란군에 패배하자 원로원은 법무관이었던 크라수스에게 전직 집정관이 거느리던 2개 군단 외에 새로 편성한 6개군단 총 8개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공을 세우고 싶었던 크라수스는 첫번째 교전에서 패배하자 본보기로 도망친 부대에 10분의 1형(부대원 중 제비로 10분의 1을 뽑아 나머지 부대원이 그들을 죽이게 하는 형벌로서 로마 군단의 최고 형벌)에 처하기까지 하면서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고 포로들은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해 죽였다.
BC 55년 크라수스는 다시 한 번 폼페이우스와 집정관이 되었고 이후 5년간의 임기로 시리아 속주 총독이 되어 부임하게 된다. 시리아 총독이 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에 뒤지지 않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파르티아 군을 지나치게 쉽게 생각한 나머지 적의 영토로 너무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고 BC 53년에 벌어진 카르하이 전투에서 파르티아 귀족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게 된다. 이 전투로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기도 했던 크라수스의 아들이 전사했고 크라수스도 결국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살해당하게 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크라수스의 공(功)과 과(過)를 공평하게 쓰려고 노력한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파르티아군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리석음이 왕성한 로마의 행운을 꺾었다는 사실"이라며 크라수스의 끝없는 욕심이 로마 역사에 범한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크라수스는 문어발식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중에서 주된 돈벌이는 부동산이었다. 그는 낡고 황폐해져서 값어치가 떨어지는 집과 농장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 이를 리모델링하여 매입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거나 임대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동산이 부를 쌓는 원천이 된다는 것은 진리인듯하다.
한편 크라수스는 엄청난 돈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정치자금이 필요한 젊고 유능한 정치인들, 특히 원로원 의원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그로 인해 많은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권력을 돈으로 산 것이다. 이렇게 구축한 자금력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크라수스는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건 스파르타쿠스 발전 진압의 공을 두고 다툰 것 때문에 평소 사이가 안 좋던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것을 꼽는다. 그 후 당시 가장 명예로운 직책으로 간주되던 감찰관에까지 취임하기도 했다.
한편 집정관을 지낼 무렵, 크라수스는 재산의 10분의 1을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헤라클레스 신전에 기부하는 한편 로마 시민들에게도 3개월치 곡식을 나눠주고 연회를 베풀어 인심을 얻기도 했다. 역사가들이 크라수스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은 당시 로마의 거친 정치판에서 그에게 별다른 공격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크라수스의 인간성이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게 불법정치자금을 받지 않는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번은 카탈리나의 반란음모 사건 당시 누군가 원로원 회의에서 크라수스가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비난하였더니 곧바로 다른 의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이를 반박하기도 했다. 요즘 정치판도 낯설지 않다.
물론 크라수스는 시민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크라수스가 재산을 불리는 방식은 한 마디로 비열했다. 마리우스파를 숙청하고 처형하는 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몰수자산의 상당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가 활용한 또 다른 돈벌이 수단은 사설 소방대였다. 스스로 소방대를 조직해 공익 목적이 아니라 철저히 사익 목적으로 활용했다. 미리 집에 불이 날 경우를 대비하여 요금을 지불한 사람이 화재를 당했을 때만 불만 꺼준 것이다. 방재산업과 보험업을 결합한 획기적인 수익 모델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사업수완이다. 그는 여기에 더해 더욱 치졸한 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화재 진압비용을 미리 내지 않은 건물에 불이 나면 불을 꺼주기는커녕 다 타도록 방치했다가 그 부동산을 아주 헐값으로 사들인 다음 자신의 돈으로 불난 터에 새로 집을 짓고 이를 높은 가격에 임대를 놓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동산을 늘리고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고리대금업과 함께 은광은 물론 농장도 대규모로 운영했다. 자신의 은광과 농장에서 일할 노예도 대규모로 소유했다. 노예를 사고파는데도 개입했다. 그는 노예들을 교육시켜 책 읽어주는 사람(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이 맡았던 여러 업무 중 하나), 집사, 그리고 요리사로 양성했다. 교육을 통해 업무 수행 능력이 높아진 수준 높은 노예를 수요에 따라 더욱 비싼 가격으로 팔아치웠다. 요즘으로 치면 '부동산 가치투자의 귀재'라 할 수 있는 크라수스가 이토록 돈 모으기에 집착한 이유는 돈 그 자체가 아니었다. 돈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경제사학자 피터 번스타인(Peter Bernstein)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은 금과 은의 시대였다. 이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었다. 로마에서 제일가는 재산가, 3두체제의 한 축으로 로마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던 그도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패전병으로 잡혀온 크라수스에게 파르티아는 그를 혐오하며 끔찍한 죽음을 안겼다. 뜨거운 불에 녹인 고온의 액체 금을 그의 시신 목구멍(일설에는 머리라고 한다)에 들이부은 것이다. 파르티아인의 입장에서 ‘인간으로서 고상함을 잃고 돈에 미쳐 이유도 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로마와 그 문명, 그리고 그 지도자인 크라수스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 것이다.
크라수스만큼 반면교사의 삶을 산 부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돈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지만 권력 획득에 필요한 전공(戰功)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그런 콤플렉스가 그를 결국 종말로 몰고 갔다. 크라수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나 수단이 정당하지 못했기에 평판은 좋지 않았다. 돈으로 평판까지 살 수는 없었고, 재산은 모았지만 덕을 쌓지는 못했다. 남에게 베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만 재산을 사용했다. 그는 전공으로 평판을 얻어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 했으나 결국 아들과 함께 전쟁터의 고혼이 되는 화를 당했다. 로마에선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크라수스를 마주하다 보면 2천 년 전에도 최고의 재테크는 부동산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부동산으로 부를 일군 크라수스 같은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로마사>를 읽다 보면 2천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오늘 신문에서 본 듯한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일치함에 놀란다.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루고 나면 권력까지 잡고 싶어 한다는 점 역시 일치한다. 후세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크라수스의 재산 총액은 약 1억 7천 40만 세스테리우스라고 하며 이는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정의 연간 예산인 2억 세스테리우스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또한 크라수스는 포브스지가 2008년에 선정한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1698억 달러를 기록하여 8위를 차지하였다. 아무튼 크라수스는 인류사를 통틀어 부동산 가치에 눈을 든 최초의 부동산 재벌이었다. 하지만 탐욕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과학전문지 <사이언스(Science)>는 크라수스를 일컬어 "부유한 1인이 모든 자산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로마시대 불평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서 의미심장한 분석을 곁들였다. "크라수스가 차지했던 부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에 비견할 수 있지만 크라수스가 해마다 벌어들인 돈은 지금 가치로 10억 달러(약 1조300억원) 정도로 빌 게이츠의 연 자산 증가액 20억 달러에는 못 미친다고 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이 크라수스 시대 로마제국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라고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만 집중한 나머지 돈을 쓰는 법을 몰랐던 크라수스에게 인망이 쏠릴 리 없었다. 로마 시민들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는 원로원 의원인 데다 워낙 재산이 많아서 중요 인사로는 대접을 받았지만 원로원파 인사들마저도 크라수스를 경멸할 정도였다. 그래도 크라수스는 당시 기사 계급, 요즘으로 치면 재계의 영수로 활동했다.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으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등과 함께 '삼두 정치'의 일원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족했으면 아마 치욕적인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귀신' 같은 인간을 존경할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슈퍼리치의 원조이자 부동산제국을 건설했던 크라수스도 결국 탐욕으로 치욕적인 최후를 맞았다.
20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의 부동산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5대재벌 업종변화실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5대 재벌들은 지난 10년간(2007~2017) 제조업보다는 비제조업 계열사를 더 많이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본으로 쉽게 수익 창출이 가능한 건설·부동산·임대업 계열사를 집중적으로 늘렸다. 5대 재벌들의 계열사 수는 2007년 227개에서 2017년 369개로 142개 늘었고, 기업별로는 롯데가 46개로 가장 많고, SK(39개)와 LG(37개), 현대차(17개), 삼성(3개) 등의 순이었다. 비제조업 계열사가 가장 많이 증가한 곳은 롯데로 10년간 38개사가 늘었다. 이어 LG 28개, SK 18개, 현대차 14개, 삼성 12개 등의 순이었다. 비제조업계열사 증가분 가운데 건설·부동산·임대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15%(22개사)로 가장 높았다. 사업 내용에 건설·부동산·임대업종이 있는 계열사까지 포함하면, 증가 폭은 41개로 늘어난다. 건설·부동산·임대 업종 계열사는 롯데(14개)가 가장 많이 늘렸고, 현대차(9개), SK(4개), 삼성(1개) 등의 순이었다. 건설·부동산·임대 업종 계열사를 늘리지 않은 곳은 LG가 유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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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헐렁한 주말, 하루 종일 방바닥에 엑스레이를 찍다 저녁 무렵 TV를 켠다. 황금시간대를 점령한 연예오락프로그램의 주 내용은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프로그램이다. 무수한 출연자들을 탈락시키면서 한 명의 최종 승자를 가린다. 오락프로그램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대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단 한명의 영웅을 위해 99명의 탈락자들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무한경쟁시대가 빚은 안타까운 풍경이다.
최근 정부의 압박이 계속되자 겉으로는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부자들 중 80% 이상이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다. 소위 ‘알부자’일수록 비중은 더 높아진다. KB 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8 한국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우리나라 부자들의 총자산 구성비는 부동산이 53.3%를 차지하고 있으며 뒤이어 금융자산이 42.3%로 나타났다. 부자들의 자산 구성에서 절반 이상이 부동산일 정도로 비중이 높은데 이는 전년 대비해서도 1.1% 증가한 수치다.
주택시장은 어떤가. 우리나라 다주택자(2017년) 상위 10명이 보유한 주택 수는 총 3,756채로 나타났다. 이를 상위 100명으로 확대할 경우 총 주택보유 수는 1만4,663채, 상위 1%로 확대할 경우 14만 명이 보유한 주택은 총 94만4,382채로 1인당 6.7채를 보유한 셈이다. 공시가격기준으로 무려 202조7,085억 원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전체 영리법인(2017년)은 66만 6,163개이다. 이 중 대기업은 0.3%인 2,191개이고 나머지 99.7%는 중견·중소기업으로 나타났다. 이를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은 전년 대비 7.4% 증가한 2,285조 원으로 전체 매출의 50%를 차지하고 있어 대기업으로의 경제 집중도가 더 높아졌다. 더 큰 문제는 영업이익이다. 대기업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무려 35.4% 증가한 177조원으로 전체 영리법인 영업이익의 61%를 차지하고 있어 전반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쏠림현상이 두드러졌다. 불과 0.3%에 불과한 대기업들이 전체 매출의 50%, 전체 영업이익의 61%를 가져가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피눈물 속에서도 대기업들은 돈을 쓸어 담고 있는 형국이다.
주택건설시장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과 같은 도시정비사업 수주액(2018년) 중 10대 건설사가 수주한 금액은 12조 1,652억 원으로 전체의 50%가 넘는다. 10대 건설사 중에서도 대림산업과 현대산업개발, GS건설의 3개사가 수주한 금액은 5조 8,273억 원으로 총 수주액의 절반에 육박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페리클래스>에 나오는 어부들의 대화다.
“어르신, 물고기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까요?”
“그야 물에서, 인간이 사는 것처럼 살지.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고 말이야.”
500년이 지난 오늘도 부에 대한 인간 본성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18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은 삼양동 옥탑방에서‘한 달 살이’체험을 한 후, "두 시간 정도면 삼양동을 다 돌 수 있는데 동네 가게들이 다 사라지고 대기업 마트, 프랜차이즈 뿐"이라며, "대한민국 99:1의 사회가 어떻게 골목경제를 유린하는 지 볼 수 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최근 관련 통계에 의하면, IMF이후 우리나라의 중산층 및 서민층은 9% 줄어든 반면 상위 10%의 계층은 1.7% 늘어났다.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 소득의 7.6배에 이르고, 민간보유 토지 가운데 57%를 상위 1%가 가지고 있다. 고급 외제차 옆에서 종이박스를 이불삼아 잠을 자는 노숙자가 점점 증가하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승자독식사회>에서는 승자독식 현상이 생기는 이유로 ‘약간 나쁜 것이 조금 더 좋은 것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가수들보다 조금 더 잘 부를 수 있는 가수가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관객이 조금 더 많이 몰리는 영화가 다른 영화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1%의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스포츠에서는 2등에게도 상을 주지만 전쟁에서는 2등을 땅에 묻는다.
항간에 금수저들 때문에 개천에서 용龍이 나기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은 계속 나오고 있다. 개천의 미꾸라지 같은 행동을 하면서 용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동산부자를 죄다 투기꾼으로 몰고, 부모 잘 만난 금수저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개천에서 벗어나기는 요원하다. 부동산투자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시장을 분석하고 발품을 판 결과물이지 금수저를 물고 나와서가 아니다. 1등을 탓하기 전에 1등이 되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부터 반문해 볼 일이다.
지금도 다수의 개미들은 곡소리를 내지만 한 쪽에서는 현금다발을 들고 부동산 쇼핑에 나선 사람들로 북적인다. 갈 곳 없는 부동자금 규모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2016년 처음 1,000조원을 넘은 시중의 부동자금은 1년 반 만에 100조원이상 증가하여 현재(2018년 6월) 1,117조를 넘었다. 부동자금이 증가한 가장 큰 요인은 저금리기조 때문으로 보이지만 향후 금리인상 등에도 불구하고 부동자금 규모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시중 부동자금의 상당수가 여전히 부동산으로 몰려들고 있어 또 다른 크라수스를 꿈꾸는 사람들로 부동산 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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