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 역사

6. 부산의 아파트 역사를 찾아서, <3>수정아파트

김부현(김중순) 2020. 4. 20. 08:37

버스는 재개발지구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갔다. 진주가 나오겠다고 했던 중간 지점의 정류장에 다행히도 그녀는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버스는 종점까지 갔다. 그곳에서 내린 것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낯설고 기이한 세상이 그래서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집들이 모조리 부서져 있었다. 지붕이 주저앉고 벽이 무너지고 창문이 깨져, 사방에서 시멘트 먼지가 전쟁터의 포연처럼 피어올랐다. 뼈만 남은 짐승의 사체마냥 철골만 남은 가옥도 눈에 띄었다. 그 안의 누추한 살림살이들이 고스란히 비에 젖고 있었다. 살풍경한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샛노란 철모를 쓴 사내들이 쇠망치를 든 채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길바닥에 나앉은 주민 몇이 통곡을 하가 말고 철모들에게 욕을 버부었다. 다른 몇은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기만 했다. 실감 나게 제작된 영화의 세트장 같은 그 판자촌을 나는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이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진주를 찾아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까 싶게 비좁은 골목 양옆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게 허름한 집들이 이어졌다. 방 한 칸짜리 집들이 갯바위의 홍합인 양 지나치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것들도 엄연한 방이고 집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 담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은 방 안에도, 문짝이 떨어져 나간 옥외 화장실에도,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말로만 듣던 달동네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방 같지 않은 방들이 늘어선,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의 한 귀퉁이에.

 

서울 판자촌의 재개발 모습을 그린 김미월의 <여덟 번째 방>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1173-3번지에 위치한 수정아파트는 1962년 4월 준공되어 총 11동 39㎡, 1164세대의 대단지 서민아파트로서 부산 아파트의 심장으로 불리지만, 소설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근 산복도로 산자락을 따라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있는 오래된 집들과 어우러져 있는 수정아파트는 부산 아파트 역사의 산증인이다.

 

최근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산복도로에 사진 전문 갤러리가 새롭게 문을 열어 주거환경 개선의 단초를 열었다. 갤러리 수정이다. 개관과 동시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데 갤러리가 아파트에 자리 잡았다는 특수한 공간 때문이다. 갤러리 수정이 둥지를 튼 곳은 현대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수정아파트 중에서 4호동이다.

 

부산 동구 수정아파트

산복도로에 있는 집들이 그러하듯 수정아파트 역시 주민은 혼자 사는 나이든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한적하고 고요한 산자락에서 북항을 내려다보며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낡고 오래된 수정아파트는 이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간다. 초기에 한국전쟁 피란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을 품어 주었던 부산의 대표 수정아파트는 우리 시대의 애환이 깃든 유산이 됐다. 한꺼번에 개발되지 못하여 여기 저기 들어선 아파트가 무려 18개 동에 이른다.

 

막상 현장에 가서 무척이나 놀랐다. 건축물 곳곳에 균열이 진행되고 있어 위험해 보였다. 한 주민에 따르면 균열은 3년 전부터 발견되어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적으로 건축물 옹벽은 원칙적으로 소유주가 안전 점검이나 보수를 해야 하지만 주민 대부분이 70대 이상 고령인데다 기초수급자라 제대로 된 보수 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다고 한다. 여러 차례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구청에서 전문가와 함께 현장 점검을 했지만, 육안으로 점검하는 수준에 그쳤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장마철이 되면 갈라진 틈 사이로 빗물과 함께 옹벽 안에 있는 흙이 쓸려 내려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관할 구청에서는 ‘사유지’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탁상행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여 안타깝다. 하지만 길은 있기 마련이다. 근래 들어 투자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머지않아 리모델링하거나 재건축이 진행될 듯하다. 북항의 최대 조망을 자랑하는 산꼭대기 수정아파트의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