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 역사

1. 세계 최초의 아파트-로마의 인술라(Insula)

김부현(김중순) 2020. 4. 23. 09:18

세계 최초의 아파트를 이야기하려면 2,000년 전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가야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당시 로마는 세계를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급속한 성장의 결과로 인구가 도시로 몰리고 도시가 급속히 팽창하자 심한 주택난을 겪게 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오늘날의 공동주택인 집합 주거가 최초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요인이 작용했던 것이다. 천재적인 도로 건설 기술과 광대한 운송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로마는 당시에 이미 세계 각처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로 성장했기에 주거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인술라insula, 사진 : <경기일보>, 2014.6.12.

 

당시 로마에는 부자들이 거주하는 ‘도무스domus'('집'을 뜻하는 라틴어로, 로마의 귀족들이 살던집)가 주를 이루었다. 도무스는 대리

석 벽에 바닥은 색깔이 있는 돌로 되어 있었다. 화덕이 있어 집을 따뜻하게 해주고, 물은 파이프가 끌어 올리는 구조였다. 부자들은 도무스라는 단독주택에 주로 거주했지만 주택 수가 부족해지자 4~5층짜리 공동주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아파트라 불리는 ‘인술라insula’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자나 귀족은 인술라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뜨리움과 안뜰을 지닌 도무스라는 주택에서 일과 휴식을 즐겼으며 대리석벽과 유리창, 화려한 장식이 박힌 바닥은 물론 난방용 화덕과 식수용 수로를 갖춘 저택에서 살았다. 도무스 주택은 내향적인 공간구성이었던 반면 인술라는 도로를 향해 개방된 구조가 대부분이어서 인술라는 중산층이나 하층 계급의 몫이었다.

                                                                                                                                                                                     도무스(domus)

                                  

인술라는 보통 1층에 점포가 딸린 형태였다. 우리나라의 주상복합아파트와 유사했다. 부자를 제외한 하층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집합주택이었다. 로마를 비롯한 도심 지역의 땅값은 매우 비쌌고 도심에 집 지을 땅이 부족했기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인술라는 높게 지어졌지만 6층을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6층이라고 해도 당시 기준으로써는 어지러울 정도로 높은 건물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전역에는 약 46,000채의 인술라가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단독주택이 1,797채 였던 것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같은 인술라라도 층마다 사는 사람이나 내부 분위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랐다. 1층에는 보통 식당을 비롯한 각종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2층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거주했지만 윗층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계층이 다른 부류가 혼재되어 있다 보니 오늘날 우리나라 아파트의 층간소음과는 차원이 다른 층간 다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건물 안에는 오늘날 경비실처럼 노예로 이루어진 경비단이 있어 범죄나 싸움을 막았다.

 

요즘 우리나라는 대부분 부유층과 빈민층이 사는 지역이나 아파트 단지가 어느 정도 구분되지만, 당시에는 사는 집의 층수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분했던 것이다. 갈수록 부자들도 인술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아파트지만 당시 로마의 인술라도 부자들의 투기의 대상이었다. 수입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인술라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하여 점점 투기판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주택자로 골머리를 싸매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과 다르지 않다. 여러 채의 인술라를 소유한 다주택자들은 막대한 임대수입을 올렸다. 특히 로마 같은 대도시의 경우 집값은 다른 지역보다 4배가 넘을 정도였는데, 서울의 집값이 지방의 4배 이상 비싼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술라는 한정된 땅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아래층에 상점이 있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비위생적인데다 붕괴와 화재의 위험도 적지 않았고 층수가 높아 오르내리기 불편한 단점도 있었다. 로마에 이같은 인슐라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18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 영향이 크다. 프랑스 시민혁명과 더불어 산업혁명은 인류가 현대사회의 본모습을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정치적 개혁을 이루었다면 산업혁명은 농업 중심 사회를 공업 중심 사회로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을 가져왔다. 인구가 대거 몰리다 보니 이에 따른 열악한 주거환경, 노동자 착취, 삶의 질 하락과 공해, 질병 등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그중에서도 주거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공장 한 곳에 1000명이 일하면 그 주변에 1000세대가 살 수 있는 집이나 학교, 상가나 도로시설 등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공장 주변에는 거주할 만한 주택이 거의 없었다. 영국 역사상 최악의 주거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방이 수두룩했고 간이 숙소, 컨테이너형 임시 거처, 심지어는 방 1개를 2~3개로 나누어 쓰는 2교대, 3교대 방까지 등장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노동자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세기 후반 <도시계획법>을 만들게 된다. 새로 도입된 도시계획법 덕분에 거주자들의 생활의 질은 어느 정도 높여주었지만 주거유형을 로우하우스(row house, 줄지어 다닥다닥 붙은 주택)와 타운하우스(town house, 3층에 다락방을 두는 주택)처럼 획일화시키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영국이나 유럽의 도심 외곽을 걷다 보면 타운하우스와 로우하우스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을 지을 때 옆집과 간격을 띄우지만 타운하우스는 옆집과 간격을 두지 않고 붙여서 지은 집이다. 도심지에 가격이 비싸 집 지을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