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 역사

3.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1962년)

김부현(김중순) 2020. 6. 2. 10:01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는 ‘단지’ 개념의 새로운 아파트들이 등장했다. 1961년 5ㆍ16 군사 정변 세력은 '군사혁명의 생활혁명으로의 전환'이라는 모토 아래 대대적으로 시민아파트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그 시작으로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농장터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부유층 자제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포아파트를 계기로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붐이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 아파트의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거목적뿐만 아니라 투기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탄생한 것이 마포아파트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시대적 요청에 각광을 받고 건립된 본 아파트가 장차 입주민들의 낙원을 이룸으로써 혁명 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고 축사를 했다.

 

마포아파트, 사진 : 한국토지주택공사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의 선구자였던 마포아파트는 계단식 구조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임대아파트였다. 1961년 10월 착공하여 1964년 11월 1, 2차 공사가 전부 완성되었다. 대한주택공사가 직접 주도한 건축으로 처음부터 고밀도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기획된 아파트였다.


당초에는 1962년 말 완공 예정이었고 10층 규모에 11개 동, 총 1158호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의 반대로 6층, 6개동, 642가구로 줄어들었다. 단지 평면이 Y자 형으로 배치되어 유럽 아파트의 컨셉에 가까웠다. 완공 직후의 항공사진을 보면, 르 꼬르뷔제의 계획안 ‘Tower in the Park’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철근콘크리트조에 입식 생활 방식의 내부 구조를 택했다. 특히 2차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단형 아파트로 건축되었다. 이 방식은 복도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사생활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또한 복도 등으로 활용해야만 하는 옥외공간을 가구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획기적인 구조를 제공한 것이다. 내진설계까지 적용되어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아파트였다.

 

그러나 마포아파트는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연탄가스 중독이 심해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입주자들이 연탄가스 배출이 잘되지 않는다며 불안해하자 주택공사 측은 방마다 실험용 쥐를 풀어놓고 안전실험을 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건축 부장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인체실험을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가스가 가장 많이 샌다는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입주율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월세가 3,500원이었는데 당시 서울 도시 근로자들의 월평균 소득이 6,600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금액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자체가 국민들에게는 생소했고 땅을 디딜 수 있는 주택을 선호했던 시절이라 특히 고층은 인기가 없었다. 고층아파트 자체가 왠지 위험하고 불안하게 느끼던 시절을 반증한 결과였다.

 

당시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공사가 발간한 <주택>에 보면, 마포아파트에 입주한 어느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해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으로 가겠다”고 말한 내용이 실릴 정도로 아파트는 인기가 없었다. 아파트는 돈없는 서민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주하려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도 “그럼 김장독은 어디에다 묻느냐”는 것이었다고 하니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사실 1960년대 아파트 건설 초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아파트는 인기가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주택문제보다는 식량문제가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전기사정도 좋지 않은데 엘리베이터를 왜 설치하나,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중앙공급난방이 말이 되나, 마실 물도 귀한데 왜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나 등 아파트 생활 자체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컸다.


그런데도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입주율이 저조하자 건축업자들은 미분양을 해소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몇몇 자금 여력이 있는 중개인들과 합심하여 5층~10층까지 미분양된 아파트를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에 계약금만 지불하고 모두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들은 고층의 불리함을 조망권이라는 프레임으로 둔갑시켜 장점화 시켰다. 자신들이 확보한 아파트가 조망권이 탁월하고 갑자기 인기가 높아 매물이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라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로 도배를 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고객이 찾아오면 중개인은 '정말 좋은 물건'이라고 소개하면서, 듣도 보도 못한 ‘프리미엄’이라는 웃돈을 얹어 매매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로얄층 등장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여러 언론에서 마포아파트를 서구식 주거 양식을 대표하는 선진적인 아파트라며 호의적으로 다루고 드라마나 영화에 부잣집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면서 ‘연탄가스가 새는 아파트’에서 ‘고급스럽고 현대화된 아파트’로, ‘고층은 위험한 아파트’에서 ‘고층은 로얄층이자 조망권이 탁월한 아파트’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입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철조망을 두른 높은 담을 단지 주위에 설치했다는 점이다. 당시 마포아파트는 주변 지역 어디서나 눈에 잘 띄는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부인의 차단을 막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요즘 대단지 아파트단지는 대부분 담장을 쌓거나 펜스를 쳐 주변 지역과 분리하고 있는데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마포아파트였던 셈이다. 마포아파트는 1992년에 재건축되어 현재 마포 삼성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결과적으로 마포아파트는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아파트 대중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파트에 미치다>의 저자인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마포아파트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역에 보급된 단지형 아파트의 효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서술한 바와 같이 당시만 해도 상류층이나 사회지도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파트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부정적이었다. 1960년대 신문에 연재되었던 이호철의 세태풍자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서울 와서 삼사 년 동안에 주로 중심가 쪽에서만 이 곳 저 곳 옮겨 다녀보았지만, 며칠 지나보니 살기는 이 도원동 만한 데도 흔하지 않았다. (.....) 마포아파트가 서있는 도화동이 저렇게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한강이 흘러가고, 오른편으로 공덕동이 마주 있고, 철길 건너로는 신공덕동 만리동이 이어지고 벼랑 밑으로 들고 나오는 당인리 발전소로 가는 낡은 기관차소리도 어딘지 서울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중심가 쪽은 날고뛰는 신식도깨비들이나 돌아가는 곳일 터이고 한다한 고급주택들이 늘어선 그렇고 그런 동은 썰렁하게 ‘맹견주의!’라는 팻말이나 대문에 붙여놓고, 높은 담벼락 위에도 꼬챙이에 삐죽삐죽한 사금파리나 해 박았을 터이고 아래웃집에 삼사 년을 살아도 피차 인사도 없고 냉랭하게 지내기 일쑤이다.

 

이처럼 주택을 선호하는 일반 대중들의 아파트에 대한 인식은 냉랭했고 관심 밖이었다. 1970년 우리나라 총 주택수가 443만 3천여 채인데 이 중 아파트는 0.77%인 3만 4천 채에 불과했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흔히들 우리나라를 아파트공화국이라고 부르지만 혹자는 아파트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단지공화국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는 지적도 있다. 박인석은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범은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파트가 인기를 독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로 개발되었기 때문이고, 그 뒤에는 한국의 도시 공간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 하지만 아파트 단지는 다르다.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자족적인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이 좋다면 더 좋겠지만 나쁘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일단 진입로만 확보하면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단지라는 별천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아파트 그 자체가 아니라 아파트단지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