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자료에 의하면, 충정아파트의 건축년도는 1932년, 1933년 또는 1937년에 지어졌다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림잡아도 여든 살을 훌쩍 넘긴 아파트다. 아파트에 관심이 있어 서울을 방문할 때 종종 들르는 곳이다. 푹푹 찌는 지난 여름,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9번 출구를 빠져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 고층 빌딩들 사이로 빛바랜 연녹색 페인트를 머금은 낡디 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멀쩡한 아파트라도 보통 30년만 되면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것이 대세인 요즘, 여든 살이 넘은 아파트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의 가치에 비해 가까이 다가가보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령 아파트이자 아파트계의 신화인 ‘충정아파트’다.
‘충정’은 조선 말기 충신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공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근 들어 많은 출사자들이 은근슬쩍 잠입하다가 후다닥 쫓겨나기 일쑤다. 입구에는 손으로 쓴 무단 출입금지와 사진 촬영 금지 경고문구가 붙어 있다. 죄인처럼 도둑발로 안으로 들어가 봤다. 운이 좋았다. 건물 곳곳에 금이 가 있고, 여기저기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가 하면, 곳곳에 부서진 창틀도 있어 살짝 실망도 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내부는 다른 세상이다. 습기가 가득하고, 낡은 건물 특유의 케케한 냄새와 함께 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중앙에 거대한 굴뚝이 있고, 층마다 난간에는 햇빛을 머금은 화초가 가득했고 창틀마다 무지개 색깔의 빨래가 걸려 있었다. 1층에는 편의점과 분식집, 공인중개사사무소, 카페 등 점포가 영업 중이고, 2~5층엔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일찍이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주택 유형을 연구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파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였던 르 꼬르뷔제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인 건축물이 바로 충정아파트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 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완공되자마자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건물 중앙이 비어 있는 중앙정원형 아파트로 연면적 3,550㎡, 한 층에 10가구씩 60가구가 중앙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중간에는 거대한 원통형 굴뚝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난방시설로 보여진다. 초창기에는 건물소유주였던 도요타 다네오의 이름을 따 한국식 발음인 풍전아파트로 개칭되어 혼용되다 유림아파트로 바뀐다. 한국전쟁 중에는 잠시 인민군재판소로 활용되어 지하실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축가 황두진의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서울신문, 2016.6.21.)라는 기고글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
추정하자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기간은 서울 함락에서 수복에 이르는 6월 28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3개월이었을 것이다. 물론 1951년 1·4 후퇴 당시인 1월 4일에서 3월 14일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개전 초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인민군 재판소가 여기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건물이 당시 우익 인사들이 수용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의 중간 지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학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건축사와 전쟁사가 교차하는 중요한 사례로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인민군재판소로 사용한 후에는 유엔군호텔로 매입되었다가 아파트로 용도를 변경했다. 동네북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숱한 아픔을 겪다 1961년 마침내 한국정부에 양도된다. 양도를 받자마자 정부는 아들 6형제를 한국전쟁에서 모두 잃었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로훈장을 받았던 김병조라는 사람에게 아파트를 통째로 불하를 해주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당시 시가로 5천만 원 정도였다.
하지만 불하를 받은 김병조는 이내 흑심을 품었다. 4층짜리 아파트 윗층에 5층을 무단증축하고 아파트의 이름도 ‘코리아관광호텔’로 바꿔버렸다. 이에 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한국전쟁에서 아들 6명을 잃었다는 김병조의 가족사가 모두 거짓말로 들통나면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결국 구속되자 정부가 다시 몰수하게 된다. 정부가 한 사기꾼에게 당해 아파트를 전체를 날릴 뻔했다. 그후 1975년 서울신탁은행에게 넘어가 일반인에게 분양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9년 8차선 도로확장으로 인해 3분의 1이 잘려나가는 기상천외한 아픔을 겪었지만 나머지는 위풍당당하게 지금도 남아 있다. 요즘은 고층 건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에 들어선 건물이 제법 위용을 뽐냈을 것이다.
과거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일부러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가구들도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충정로 일대는 지금의 강남 8학군에 버금가는 명문학군이었다. 1896년 개교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동초등학교 때문이었다. 미동초등학교는 소파 방정환, 작곡가 나운영, 시인 조병화, 방송인 엄앵란·사미자 등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한 명문이다.
충정아파트는 벽돌로 지은 미쿠니아파트와는 달리 콘크리트 자재를 썼고 외관도 비교적 현대식으로 설계됐다. 평면 구조는 4개의 다다미방과 부엌, 화장실을 갖추었고 개별난방시스템을 방식이었다. 제법 현대식 아파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파트 건물 안에 공동화장실과 식당, 오락실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사택'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미쿠니아파트가 사택으로 지어진 것에 반해 충정아파트는 우리나라의 첫 임대아파트였다. 또한 시설도 처음으로 아파트에 맞는 형식으로 건설되어 충정아파트를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칭한다. 사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아파트를 건립한 사람도 일본인이었고 그곳에 사는 주민도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상류층이나 중산층은 주로 한옥에 살았고 하층민들은 가마니로 만든 '토막집'에 거주했다. 아무튼 여든을 넘긴 충정아파트가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서‘역사의 증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아파트계’의 자부심이자,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조한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는 충정아파트를 일컬어 “층마다 창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로로 긴 돌출된 콘크리트 프레임은 심지어 역동적인 움직임마저 느끼게 한다. 누군가 아름다운 비례와 수평적인 역동감을 입면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고민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서양 근대 건축사 책에서 본, 수평성이 강조된 데스틸De Stijl 양식의 건축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한때 재개발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2013년 서울시에서 ‘100년 후의 보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 그런데 2022년 6월, 서울시는 충정아파트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보존이냐 개발이냐는 캐캐묵은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철거된다니 아쉽다. 건물만 철거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가 철거되는 것이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2061614340142653&outlink=1&ref=https%3A%2F%2Fsearch.daum.net
국내 최고령 '충정아파트' 철거된다..일제강점기 준공 '85살' - 머니투데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가 철거된다.서울시는 15일 제7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충정아파트 철거 내용을 담은 서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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