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

30.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철저히 준비하겠다’는 말은 ‘그냥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김부현(김중순) 2020. 10. 17. 10:23

블로그지기의 대학 후배인 P는 금융기관에서 15년 근무한 베테랑 경력자다. 업무성과는 물론 평판도 좋아 승승장구하여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P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한구석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2년 전 은행을 박차고 나와 부동산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금융 관련 자격증도 있었던 터라 부동산 일을 하기에는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퇴사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여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업계에서도 인정받아온 만큼 경력과 노하우는 물론 자금도 있었지만 정작 창업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아직도 준비만 하고 있다. 수차례 창업을 권했지만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하여 창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더 공부를 해서 창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소위 유비무환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펴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려 한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를 위해 백방으로 자료를 찾는 사이 정작 시작의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심리학자 피터 홀린스Peter Hollins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필요한 정보의 양은 40~70%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더 확신을 갖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하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오히려 그러한 정보에 파묻혀 타이밍을 놓치기 쉽상이다. 세상일이란 대개 준비하고 계획한 대로 딱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따라서 너무 완벽하게 준비하려다 보면 오히려 준비가 장애가 되기도 한다. 정보와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정과 집중력이다. 준비 부족은 집중력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불안함 때문에 끊임없이 더 완벽한 준비를 하려고 하지만 어떤 일이든 완벽한 준비와 완벽한 정보는 없다.

 

그리스의 코린토스 왕이었던 시지프Sisyphus는 신들을 속인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며칠 아니 몇 달에 걸쳐 등골이 휘어지는 중노동을 통해 바위를 산꼭대기로 겨우 밀어 올리자마자 바위는 엄청난 속도로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다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렸으나 바위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정말 무의미하고 맥빠지는 노동을 반복해야 했다. 이것은 오로지 신들만이 고안할 수 있을 법한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다.

산꼭대기의 바위는 계속 굴러떨어질 것이고 시지프는 그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면서 어쩌면 영혼의 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고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삭임을 통해 그는 자기 삶을 회상하고 반성하게 될 것이다. 무의미한 반복노동에 담겨 있는 진짜 형벌은 등골이 휘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노동에 대한 결과라고 간주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20세기의 양심’으로 불리는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나친 준비도 문제지만 현재의 일상을 유지한 채 삶의 전환점을 만들겠다는, 부동산으로 돈을 왕창 벌겠다는 것은 더 심각하다. 시지프의 형벌처럼 먼저 자신의 삶이 무한반복적인 일상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봐야 한다. 반복적 일상에 따른 맹목적인 노력으로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신학자 장 칼뱅Jean Calvin은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신은 말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일이든 그저 노력만 한다고 해서 헤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다. ‘열심히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에 사기치지 마라. 삶에 대한 결과물이 없을 때 써먹는 핑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노력의 틀과 의식의 뿌리 그 자체부터 바꾸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형벌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하면 사실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을 인식하고 의식이 깨어난 상태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은 매 순간이 고통이다.

 

우리가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부자를 꿈꾸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궁핍하여 배려심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되면 좋은 점이 많다. 자신보다 못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멸시의 강도를 높일수록 자신의 존재감도 더 높아진다. 인간은 대개 나보다 부자인 사람이 자신을 멸시하면 그 멸시를 시정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 멸시를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편을 택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탑승할 수 있는 칸과 자리가 지정되어 있다. 뒷칸에서 앞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를 벌여야 한다.“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날카롭다.

 

리언 페스팅어Leon Fetinger는 ‘인간은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라 나중에 합리화를 도모하는 생물이다“라고 했다. 사냥개를 평가할 때도 날렵한 움직임이 최고의 기준이지 개의 목걸이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거나 화려한 저택에 엄청나게 많은 월세를 거둬들이는 사람들, 자본주의적 표현으로 하면 부자다. 이 역시 외형적인 소유물에 대한 산물이지 그 사람의 내면에 의한 기준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폐해 중 하나는 가짜 욕망을 심어줌으로써 외형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것에 익숙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아파트를 살 때는 위치는 물론 수도꼭지까지 철저하게 살피지만,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 사람이 걸친 장신구만을 보고 평가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자본의 힘이 옳고 그름의 문제까지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시스템에서 ‘인간을 이해하자’라는 철학적 담론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철학이든 도덕이든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먹고 사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훌륭한 철학이나 도덕도 가뿐하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도“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나머지는 다 부속기관이다”라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철학이 입과 항문 앞에서도 신나게 주접떨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