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매일 오전 9시만 되면 주인이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다.
이제껏 주인은 한 번도 칠면조의 식사를 거른 일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식사는 오전 9시면 어김없이 나온다.
정말로 고마운 주인이 아닐 수 없다.
칠면조는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9시에 주인의 행동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맛있는 식사 대신에 칼을 들고 왔다.
추수감사절 오전 9시에 칠면조는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들려주는 ‘칠면조의 예화’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근거로 미래를 예측하는 귀납법은 오류라는 것이다. 오늘 오전 9시까지 예외 없이 식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내일도 같은 시간에 식사가 나올 것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들도 칠면조의 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박따박 나왔던 월급이 갑자기 끊기거나 잘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월급을 받아서는 결코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없고, 부자가 될 수도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르도David Ricardo는 월급을 더 많이 주게 되면 아이를 더 낳게 되고 그러면 시장에 월급쟁이 숫자가 많아져 또다시 월급이 낮아지기 때문에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월급을 받는 구조가 반복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월급쟁이가 부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입에 풀칠할 정도의 월급만 주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실거래가로 신고된 서울 반포주공 1단지 138㎡(42평)의 매매가는 39억 원, 3.3㎡당 1억 원에 가깝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경우 202년치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월급으로 집을 사기는 더 어려워진다. 미국인의 95%는 연 소득 4만 달러 이하의 월급쟁이나 파트타이머다. 게다가 월급쟁이는 길어야 28년 정도지만 퇴직하고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끔찍하다. 이런 엄중한 상황임에도 마치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위험을 느끼지 못한 채 삶겨 죽는 개구리처럼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다. 혹자는 오래 다니다 보면 회사가 알아서 직급도 올려주고 월급도 올려주어 삶을 윤택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믿음이다.
자본주의의 게임 룰에서 기업은 최대한 인건비를 줄여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목표다. 단도직입적으로 기업은 월급쟁이를 소모품이자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기업시스템이다. 존엄한 인간을 하찮은 상품으로 간주한다는 데 발끈한다면 월급쟁이를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기업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평생 내 모든 것을 바쳐 일한 회사인데 해고라니! 회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이러한 분노는 분노가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회사에서 더이상 쓸모없는 상품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문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가수 신해철이 노래했던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 퍼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라는 노랫말이 가슴을 후벼 팔 것이다.
이처럼 월급쟁이에게 불리한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지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월급 외의 수입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설령 쌈짓돈을 모았다 하더라도 투자를 못한다. 퇴직금 받아 도박에 가깝다고 하는 선물·옵션과 같은 파생상품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변화무쌍한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환금성이 낮다는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10년 이상 걸리는 재개발·재건축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위험하다는 이유로 제로 금리에 가까운 은행에 예금하는 손쉬운 방식을 따른다.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종잣돈으로 위험이 있는 투자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크게 불만이 없다. 비슷한 아파트 평수에, 비슷한 월급에, 비슷한 자동차를 타고 있다. 결국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편안함을 택한다. 부자가 될 수 없는 사고의 전형이다.
미국 시카고의 부동산 중개업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글렌게리 글랜로스 Glengarry Glen Ross>에 “너희들처럼 앉아서 장사를 하려는 놈들은 현대차를 몰고, 나같이 뛰어다니는 사람은 BMW를 타고 나니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어떤 일을 하던 현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후퇴다. 부자들은 골프 치고 해외여행만 다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변의 일상은 치열하다. 수백만 원 하는 부동산 강의를 듣기 위해 해외를 오가고, 수십만 원 하는 새벽 조찬 모임을 통해 새로운 투자처를 끊임없이 물색한다.
지금 우리 경제는 과거의 부동산 투기 열풍에 따른 후유증에다 산업화 시대의 규칙과 절차를 뛰어넘어야 하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고용시장의 경직성으로 소득계층 간 양극화는 더욱 고착화 되고 있다.‘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경제의 효율성’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한계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숫자 너머의 인간 심리와 사회문화적 요소가 경제학은 물론 부동산에도 새로운 의사결정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스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에서 ‘야성적 충동’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이 말은 결국‘경제는 심리다’라는 의미다. 경제는 돈으로만 굴러가지 않으며 그보다는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주류경제학이 경기순환, 실업, 부동산, 금융시장 등 현대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신앙처럼 주장해 왔던 묘수들이 이제는 결코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도 경제 주체들의 비관적 심리가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로 돌아가 보자.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등으로 부동산시장에 매물 폭탄이 쏟아졌다. 국가가 곧 부도날 것이라는 악의적 언론 기사들이 더해지자 부정적 심리가 활개를 쳤고 금리는 10%를 웃돌았다. 부동산을 사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놀란 개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꽁꽁 숨어버렸다. 주택가격은 1998년 한 해에만 무려 12.4% 폭락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정부는 경기회복을 위해 부동산 활성화 대책들을 쏟아냈다. 차츰 매수세가 증가하고 환율도 안정세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가가 부도날 것이라는 소문이 자취를 감추자 부동산가격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가격이 폭등하자 이번에는 또 여러 규제책을 내놓았다. 매수세가 꺾이고 가격은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규제를 강화하면 매수세가 줄어 가격이 하락하고 규제를 완화하면 매수세가 늘어 가격이 상승하는 흐름이다. 역대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이러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동산 매입 시점으로는 언제가 바람직할까?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가격이 폭락하고 매수자가 거의 없는 ‘최악의 경우’에 사는 것이다. IMF 당시 국가부도설이 판치는 상황에서도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매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과 3년 만에 몇 배의 차익을 남겼다. 일거에 부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매수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어 선택의 폭도 넓고 괜찮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한 마디로 대중이 사면 팔고 대중이 팔 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투자다. 그러나 최악의 시기에 독불장군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이 왼쪽으로 갈 때 오른쪽으로 가려면 돈이 아니라 확신이 있어야 한다. 확신은 시장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부동산에 심리학과 인문학을 입혀야 하는 이유다. 특정 지역의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것은 단순히 입지가 좋고 수요가 많은 것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그 부동산으로 인해 향유하는 자존감이나 권위와 같은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인문으로 무장한 부동산투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럼 부동산시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먼저 입지 좋은 대단지 소형아파트의 미분양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한 마디로 가장 인기 있는 국민주택의 미분양은 매수세가 최악이라는 반증이다. 그리고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경우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는 실거주 목적이지 투자 목적은 아니다. 간혹 전세가 상승이 매매가를 동반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매매가가 떨어지고 전세가가 오른다는 것은 결국 투자가치가 별로 없다는 의미다. 물론 갭투자의 기회일 수도 있지만 대출이 막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집을 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시락 싸들고 말리는 경우다. 또한 출근해서 신문을 펼쳤는데 ‘국민주택 미분양 발생’,‘부산 아파트값 100주 연속 하락’과 같은 섬뜩한 기사들이 경제신문 1면을 차지하고 있다면 이 역시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지금이 최악이라고 말할 기력이 남아 있다면 아직은 최악이 아니다.“ 라고 했다. 부동산가격도 영원한 하락은 없고, 투자에서 영원한 하락장은 없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그 어떤 전문가도 부동산시장을 100%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고, 수많은 시장참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에 훈풍이 불면 대중은 모였다 하면 ‘기·승·전·부동산’이다. 포장마차 뒷골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도 대화의 주제는 ‘어디가 올랐네’, ‘어디에 분양을 하네’ 등과 같이 온통 부동산 이야기뿐이다. 그러나 가격이 폭락하고 언론에서도 양념을 치고 정부의 규제가 더해지면 매수심리가 확 꺾여 언제 그랬냐는 듯 부동산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연예인 가십 기사로 술잔을 기울인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Thomas Piketty도 일찍이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를 앞질러,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것이다. 일해서 버는 돈보다 부동산으로 버는 돈이 훨씬 많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잘 알려진 로버트 기요사키Robert Kiyosaki는 <부자들의 음모>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융상식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한다. “분산투자 하지 말고, 저축도 하지 말고, 보험도 들지 말라”고 한다. 모두 부자들의 호주머니를 채우기 때문이다. 부자들을 위한 허가난 도박장, 주식시장에서 지금이 주식을 살 적기라면서 끊임없이 꼬드긴다. 한 푼 두 푼 모아 은행에 저축하면 부자들, 기업들이 모두 가져간다. 그리고 대출금을 떼먹고 잠깐 감옥 갔다 오면 끝이다. 결국 부자들이 떼먹은 돈을 메꾸려면 또 가난한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악순환은 반복되고 있다. 부동산도 과거와 같이 투기성 눈먼 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빛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입구에서 깊숙이 이어진 통로 저 안쪽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동굴거주자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게다가 눈가리개까지 씌워져 있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볼 수 있다.
동굴 위쪽에는 불빛이 타오르고 있다.
한 포로가 스스로의 족쇄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자 모두들 동굴 밖은 춥다며 탈출하려는 포로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이다. 동굴은 우리 모두가 어떤 시점에서 머무르게 되는 장소, 즉 편안한‘안락지대’를 말한다. 직장일수도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인간은 안락지대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안락지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위치한 장소에서 뿌리를 내려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자동판매기처럼 일상을 이어간다. 간혹 변화를 시도하는 선구자적인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안락지대 거주자들이 숫자로 뭉개기 일쑤다. 동굴을 벗어나는 것은 변신하는 과정이지만 동굴을 벗어나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경험한 것들을 동굴거주자들에게 전하기가 쉽지 않다. 떼로 몰려들어 ‘그것 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하면서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게 한 마리를 냄비에 넣고 삶을 때는 뚜껑을 덮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는 유유히 탈출한다. 그러나 여러 마리를 삶을 때는 뚜껑을 덮을 필요가 없다. 게들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용감한 게 한 마리가 냄비 위쪽으로 기어 올라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잽싸게 다른 게들이 힘을 합쳐 탈출하려는 게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져 다시 냄비 속으로 끌어들인다. 같이 죽는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이다. 지금도 대중은 둘 이상만 모이면 이른바 ‘냄비 속의 게’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성직자 장 칼벵Jean Calvin은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신은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껏 직장이나 사회에서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침 눈뜨면 기계적으로 집을 나서 저녁 어둠이 깔려야 귀가한다.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노동하는데 투자한다. 일하는 시간에도 여유가 없다. 조직은 연일 새로운 목표를 부여하고 관리자를 내세워 목표달성을 다그친다. 목표에 미달한 사람 순서대로 도태된다. 자본주의의 태생이 경쟁을 위해 몸을 다그치고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담론은 고리타분한 존재로 취급받기 일쑤다. 목구멍이 살찔수록 그에 따른 정신은 공허해진다. 물리학자인 아르망 트루소Armand Trousseau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다”라고 했다. 인문학이 바탕이 되지 않는 그 어떤 지식이나 학문도 모래성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다. 최악의 투자자는 인문학이 부재한 투자자이다. 그간 우리는 수학, 과학, 역사 등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배웠다. 수학자들은 산식 안에서, 작가들은 단어 안에서, 역사가들은 역사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통섭의 시대이다. 철을 깎는 인문학자, 그림 그리는 수학자, 심리학을 공부한 공인중개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 어떤 학문도 결국 인간에 다가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최재천 교수는 <통섭적 인생의 권유>에서 이렇게 조언했다.
인문학은 모든 학문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인문학적 기반이 없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결과를 낸다고 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떤 결과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려면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보기엔 배고픈 것일 수 있지만 미래를 봐야 한다.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에는 인문학이 더욱 각광 받는다.
-출처 : <이틀에 끝내는 재개발 재건축>, 2019. prologu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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