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23. 정오쯤 서울역에 내렸다.
그냥 온 몸이 찌푸퉁했다.
따뜻한 남쪽나라 부산에 며칠 다녀오면 간혹 몸도 마음도 빨리 적응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소위 부산과 서울의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아니, 시차적응이라기 보다는 온차적응(온도차 적응)에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온도차는 내 몸이 먼저 느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부산과는 차원이 다른 바람이 불어댔다.
분명 부산에선 봄바람 이었는데 말이다. 서울의 바람은 아직 겨울바람이었다.
서울역 앞 도로는 예상외로 뻥 뚫려 있었다.
총알처럼 지나가는 차를 보니 "처갓집에 불이 났는가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차도, 사람도, 바람도, 햇살도 바쁘기만 한 서울이다.
바람이 등을 떠미는 대로 몸을 맡겨 일터에 도착했다.
하늘의 해는 점점 식어가고 금새 사무실 앞 도로 위의 차들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옴짝달싹 못하고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부산과 서울의 온차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한강 산책도 하루 쉬기로 했다.
몸이 흐트러지니 마음마저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누군가 걸리기만 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사무실 수건걸이의 뾰족한 못처럼 자꾸만 마음이 툭 툭 튀어나왔다.
못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의 생명은 대가리인데 대가리가 없는 못이 있다. 이놈은 망치에게 한 번 맞아보고는 망치가 무서워 도전을 완전히 포기한 놈이다.
그리고 타원형이나 S자로 꼬부라진 못이 있다. 이는 도전하다 여러 번 실패를 맛 본 놈이다. 대견하다. 이런 놈은 망치로 곧게 펴주기만 하면 다시 도전할 놈이다.
마지막으로 대가리와 몸통이 성한 못이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망치가 두려워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새 못이다.
이런 못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다.
징기즈 칸이 <매 사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사냥을 마치고 부하들은 먼저 보내고 숲길로 들어섰다. 팔목 위에는 그가 아끼는 매가 앉아 있었다.
매는 사냥감을 보면 날아올라 쏜살같이 낚아채서 가져오곤 했다.
더운 날씨여서 목이 말랐다. 물이 있을 듯한 곳을 찾아가던 중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말에서 내렸다.
사냥 가방에서 은잔을 꺼내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모았다.
잔에 물이 어느 정도 찼을 때 마시려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매가 휙 하고 날아와 잔을 쳐버렸다.
물은 쏟아져버렸고, 매는 주위를 몇 번 날더니 바위 위에 앉았다.
징기즈 칸은 다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물이 조금 찼을 때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매가 덮쳐 떨어뜨렸다.
장난치고는 너무 심했다.
이렇게 반복되자 칭기즈 칸도 화가 났다.
"이 녀석 가까이 있다면 목을 비틀어버릴 텐데"
이번에는 칼을 빼들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 하는데 매가 다시 덮쳤고, 잔은 저만치 날아가 깨져버렸다.
"에잇!"
칼이 허공을 가르고 매는 땅에 떨어졌다.
잔이 깨져버려 하는 수 없이 물이 나오는 웅덩이를 찾기로 했다.
어렵사리 바위에 오르니 물이 고인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 웅덩이 속에는 독사로 보이는 뱀이 죽어 있었다.
물을 마셨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징기즈 칸은 죽은 매를 옆구리에 끼고 막사로 돌아와 금으로 그 형상을 뜨게 하고 한 쪽 날개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겼다.
"분노로 행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다른 날개에는 이렇게 새겼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이 글은 화가 났을 때는 가급적 어떤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굳이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상대방으로 인해 분노하거나 '화'를 내곤 한다.
물론 평생 화를 내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지간히 심지가 곧은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화가 난 상태에서는 행동도 자제력을 잃고, 소위 십 원짜리 욕이 나오곤 한다. 'ice ba', 자매품인 'ice bal', 'ice bal-nom,'과 같은 십 원짜리 아이스크림 이름을 외치곤 한다. '화'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이라고 한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곧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배움이라고 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면 과연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화가 난다고 십 원짜리를 남발하는 하는 것은 정신적 폭력이다. 육체의 폭력으로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아물겠지만 정신적 폭력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런데도 육체적 폭력은 죄가 되어 금방 구치소에 수감되지만, 마음에 대한 언어폭력은 왜 감방에 가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을 도와줄 능력과, 다른 사람을 망가뜨릴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서로 웃으며 도와주면 함께 나아갈 수 있지만, 서로 화를 내고 헐뜯는다면 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다.
태양과 비가 적당히 조화를 이룰 경우에는 비옥한 땅이 만들어지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비방하고 헐뜯는다면 땅은 말라비틀어지거나 홍수로 인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느 작가의 말이다.
"남에 대한 질투나 시기, 증오심은 모두 한 데 엉켜있는 거미줄을 흔드는 행위와 같다. 일단 내가 남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면 그 해악이 거미줄을 타고 다른 사람에게로 계속 퍼져 나가 결국에는 다시 내게로 온다. 결국 거대한 그물이 한꺼번에 엎치락뒤치락 흔들린다. 그리고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거미줄은 언제 어디에서 멈출지 모른다." 이른바 꿈을 이루는 데도 '거미줄 법칙'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는 론다 번(Rhonda Byrne)의 <비밀>에 나오는 '우주의 법칙'과 켄 블랜차드(Kenneth Hartley Blanchard)의 <Key>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과 괘를 같이한다. 즉, 성질이 비슷한 것들끼리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긍정은 긍정끼리, 열정은 열정끼리, 거미줄은 거미줄끼리, 우주의 파동은 같은 파동끼리 끌어당긴다는, 소위 '끼리끼리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의 꿈이 확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운명을 믿지도 않으며,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열정을 나누어 준다.
'Give and Take',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게 마련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에서 보듯이 열정을 나누어 주면, 그 열정은 반드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 꿈도 마찬가지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이룰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이룰 수 있다.
그러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절대 비관론자가 아니다.
비관론자에게는 어떤 희망의 선물을 주어도 그 선물은 타고 남은 재로 변한다.
그들은 두려움과 의기소침함에 휩싸여 그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대부분이 과거에는 누군가의 꿈에 불과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분노와 화를 깨끗이 세탁해보면 어떨까?
햇살 좋은 오늘, 우리의 호주머니 속에서 잠자고 있는 꿈을 세탁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세제를 있는 대로 잔뜩 넣고 한 일주일 정도 세탁기에 돌리면, 우리의 화난 마음들이 깨끗해 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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