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

40. 다시 읽고 깊이 읽기-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부현(김중순) 2024. 12. 24. 07:41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몇 권의 공책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메모를 했다고 한다.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앞둔 기조연설에서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저는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광주가 2024년 12월 우리를 구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만든다. 과거에 누구와 시간을 보냈는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현재의 내 모습이다. 미래의 내 모습 역시 오늘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갔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흔히들 현재에 충실하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늘 걱정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광고업계에서는 종종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보험이다. 보험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미래의 두려움을 활용한다. 슬픔은 과거와 관련이 있지만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오늘을 충실히 살면 내일의 삶이 충실해지는 것보다, 내일의 충실한 삶을 위해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자신이 목표하는 미래를 근거로 행동한다.’고 한다. 따라서 미래의 나와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나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미래의 나를 명확하게 보고 그 모습에 관심을 가지면 모든 생각과 행동은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 내가 기대하지 않는 것,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도 “외부 세계에서는 수백만 가지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모두 내 경험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일들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만 경험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명확할수록, 목표가 분명할수록 여러 갈래의 길을 앞에 두고 방황하는 일은 줄어들게 된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이 있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다. 그는 “미래의 나와 연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비결이다”라고 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된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라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자전적 수기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저자가 직접 경험한 내용으로 정신과 의사가 죽음에서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한 단락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500명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며칠 밤과 낮을 계속해서 달렸다. 열차 한 칸에 80명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소지품을 담은 짐꾸러미 위에 누워 있었다. 열차 안이 너무나 꽉 차서 창문 위쪽으로 겨우 잿빛 새벽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모두 이 기차가 군수공장으로 가는 것이기를 바랐다.(......)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갔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저기 팻말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추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새벽이 되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몇 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 탐조등 그리고 희뿌연 새벽빛 속에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는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행렬, 가끔 고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교수대를 상상해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 점점 더 끔찍하고 엄청난 공포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33~35쪽)

빅터 프랭클, 그는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할 당시 이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심리치료와 철학의 경계를 탐구하던 그는 1931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을 개업했지만 개원한지 몇 달 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나치를 피해 병원 문을 닫고 부모의 집에서 정신과 치료를 이어갔다. 1942년 간호사 틸리와 결혼했지만 결혼하자마자 그와 틸리, 그의 부모 모두가 나치에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 6개월 후 그의 아버지는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2년 후 그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어머니는 강제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아내는 다른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5년 4월 27일, 마침내 미군이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을 해방시키자 곧장 아내와 가족을 찾기 위해 빈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아내와 어머니, 형, 형수가 모두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가족 중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심리치료 학파인 로고테라피와 관련하여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라는 개념도 소개하고 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게 되는 어떤 행위를 오히려 하려고 할 때, 극도의 고통에서 농담을 할 때, 오히려 그 행위를 그치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면증 환자의 경우 자려고 노력하는 대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는 경우 말을 최대한 더듬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보라는 것이다.

그는 생사를 오가는 수용소에서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책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견뎠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수용소 밖의 희망만 본 채 안에서는 절망을 느꼈지만, 그는 수용소 안과 밖을 동일시하고자 했다. 그 결과 고통스웠던 하루하루의 삶이 정제되고 계획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일상이 건조해지고 의욕이 사라질 때 읽어볼만한 책이다. 1946년 출간되자마자 순식간에 수천만 부가 팔렸고, 1997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24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1억 권 이상 팔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되고,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154~155쪽)


<죽음의 수용소에서> 대표하는 문장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어떻게 해서든 견뎌낸다.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 했던 잘못된 행동을 지금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라.

-인간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