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25. 다시 읽고 깊이 읽기-김경준의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김부현(김중순) 2014. 12. 25. 20:00

년백수와 실업자,

제2의 도약을 꿈꾸는 '을'을 위한 책,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크리스마스를 맞아 방바닥에 X-레이를 찍다 뜬금없이 서재를 청소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책을 하나 건졌다.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이다.

2년 전 세 번 정독했던 책이다. 낙서는 물론이고 온갖 형형색색 밑줄이 그어져 있어 당시의 열정과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 기분이었다.

갑을논란이 심한 요즈음 로 태어나 조직생활을 처음부터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볼 수 있는 책이다. 쉽고 재미있게 <군주론>을 접할 수 있다. 마흔이 아니라 조직생활을 앞둔 새내기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력서 100통을 내고, 면접을 아무리 봐도 취직이 안 되는 청년 백수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알고 보면 <군주론>은 통일국가 실현이라는 거창한 바램에서 출발했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이 공직에서 잘리고 백수 시절, 다시 취직을 하기 위해 쓴 피눈물나는 자기소개서이자 이력서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자세히 보면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군주를 위하는 척하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

따라서 <군주론>은 성공하고 나서, 나이가 들어서, 사회적 경륜이 쌓이고 나서 읽는 고전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앞둔 청춘들, 실업자나 백수들이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군주론>을 이렇게 평가했다.

"마키아벨리는 왕들을 가르치는 척 했다. 그가 진짜로 가르친 것은 민중들이었다."

 

 

 

 

 

고전에서 리더십의 해법을 찾다

 

 

 

 

14년간의 공직경험을 토대로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는 종종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파렴치한, ‘마키아벨리즘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덤에 있는 마키아벨리로서는 좀 억울한 일이다. 마키아벨리즘으로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려는 단순함을 버려야 마키아벨리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즘은 사익이 아닌 공익의 차원에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마키아벨리에 빠져 오랫동안 관련 서적도 읽고 강의도 들어본 결과 그는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 아닌 현실적 처방전을 제시한 역사구루이자 리더십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알려진 것처럼 <군주론>은 온갖 음해에도 불구하고 500년이라는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읽히고, 해석되고, 반박되고, 숭배되고 있다. 끊이지 않는 비난과 저주에도 <군주론>이 반열에 오른 것은 진실의 힘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을 경험한 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나아가 공개적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을 용감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군주론>이 500년이 지난 지금도 필요한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방법은 달라졌지만 인간사의 근본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서는 프롤로그 '글을 시작하며'가 18쪽에 달하는 장문이다.

따라서 프로그를 정독할 필요가 있다.

프롤로그에 책 내용이 잘 함축되어 있다.

 

 

세상살이의 본질은 시대가 바귀어도 변하지 않는다...

만물은 변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는 빨라진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물의 진화가 그렇듯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적 측면도 변하지 않는다.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려면 냉혹한 현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상론과 현실론의 조화가 중요하다.

 

 

'착하게 살자'가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아 '함께 번영하자'는 것이 조직논리에 부합한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게 '현실적 리더십'은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한 '팔요조건'이고, '이상적 리더십'은 '충분조건'이다.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은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마구 사용해도 된다'는 무지막지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사익이 아닌 공익의 목적에 부합할 때 적용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 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도덕을 외치는 종교인도 아니고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는 비난받는다.

마키아벨리는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리더가 가져야 할 힘과 역량에 대해서 정면으로 용감하게 진실을 이야기 한다.

 

 

눈으로는 하늘을 보면서 이상을 추구하되, 발은 땅에 딛고 현실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진정한 리더다.

추상적 명분에 사로잡혀 뜬구름잡는 도덕론을 펼치는 자는 마키아벨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지만 재산상 손해는 잊지 못한다."는 이 구절은 <군주론>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뜨거운 감자다.

밥을 먹지 못하는 놈에게 도덕은 허구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 김훈이 생각난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김훈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뭣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중략)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 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支嚴)한 것이다. ,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구석기의 사내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 먹을거리를 포획할 수가 없다. 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밥은 끼니 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함께 먹는 것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 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다 큰 사내들은 이걸 혼돈해서는 안된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낟알들이 입 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적으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중략)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돈과 밥 위에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아버지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존재가 상충한다.

그러나 조직의 리더라면 윤리적 공상보다는 냉혹한 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권력자들이, 갑들이 거짓말 한다고, 위선적이라고 너무 투덜거릴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천성이다. 

 

 

 

 

세상은 힘없는 사람을 동정은 해도 존경하지 않는다.

힘없는 사람에게 위로는 해줄지언정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세상만사 힘없고 돈없으면 무시당한다.

힘없고 돈없으면 빽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힘없는 자가 겸손을 말하면 아부가 된다.

힘없는 자가 도덕을 이야기하면 자기당착이 된다.

겸손이나 도덕은 '갑'들의 특권이다.

 

 

목적과 수단은 별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대개 도덕을 운운하는 리더는 악의 논리를 펼치는 리더의 밥이 된다.

 

 

 

순자가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선이라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니체가 말했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동물과 신의 영역을 왔다갔다 하는 줏대없는 동물이다."

인간의 천성은 변할까, 아니 변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의 역사책을 들춰봐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배우고 양심이 있는 인간도 필요에 따라 도덕적인 척하는 것일 뿐이다.

5000년 전보다 더 많은 규제와 통제와 법이 난무하는 오늘을 보라. 이것들은 모두 인간불신에서 탄생된 산물이다.

  

 

 

<군주론> 17장, 사랑과 두려움....

사랑과 두려움 둘 다 가지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이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사랑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게 낫다.

 

 

CEO라면, 회사 실적이 좋고 안정적인 때 충성으로 가장한 직원들의 아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 직원일수록 회사에 위기가 닥치면 먼저 이직을 하거나 배신한다.

그리고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잔무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을 사주는 CEO의 행동을 그대로 믿지 마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일을 많이 시키기 위한 수작일 가능성이 많다. 

 

 

의원이 환자의 상처를 빨아 그 고름을 입에 담는 것은, 환자에게 혈육의 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돈이 되기 때문이다.
관을 만드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 관이 잘 팔려 부자가 되고 싶어서다.

-<한비자>

 

 

 

 

군주론과 마키아벨리에 대한 더 많은 자료....

 

-마키아벨리 연보 : http://blog.daum.net/kjs1906/1753

-<군주론> 요약 정리 : http://blog.daum.net/kjs1906/1657

-마키아벨리 명언 : http://blog.daum.net/kjs1906/1668

-<군주론> 집필 당시 이탈리아 지도 : http://blog.daum.net/kjs1906/1669

 

 

 

"자유로운 인간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도 어렵지만,

고분고분한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도 어렵다."

-마키아벨리,<로마사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