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

4.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손자의 <손자병법>

김부현(김중순) 2017. 12. 12. 11:27

<손자병법>은 손자(孫子)가 쓴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로, 영어로 번역하면 '싸움의 기술(Art of War)'이다.

승리의 비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국은 '싸우지 말고 이겨라'는 '비겁한 기술서' 같기도 하다.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지지 않기'를 더 중요시한 것이다. 부동산 투자 분야 역시 만만한 사람들이 없다. 나보다 힘센 사람들, 나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시장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과 싸워 이기기보다는 지지 않는 본전 생각이 더 시급한 당면 과제인지도 모른다. 남의 밥그릇을 빼앗기 전에 내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을 궁리를 해야 하는게 투자의 기본 원칙 아니던가. 결국 부동산 투자도 전쟁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에 더 가까운게 아닐까. 중국이나 유럽의 고전이 판치는 우리나라, 왜 우리나라의 역사서나 병법서는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룬 우리나란데 말이다.


우리가 오래된 고전에 열광하는 이유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되풀이 되는 이유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교훈을 배우지 않고 연도만 외우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무겁게 다가온다.


부동산 투자도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손자병법>의 '전쟁'이나 '싸움'을 '부동산 투자'로 바꾸어보면 일견 이해가 된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물론 장난으로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여차하면 집안이 거들날 수도 있고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부동산 투자도 전쟁이고 전쟁일 수 밖에 없다. 피가 튀는 전쟁에서 도덕이나 양심은 늘 찬밥 신세다. 전쟁은 규칙이 없다. 반칙은 용병술로 평가받고 잔꾀는 탁월한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정정당당이니 규칙이니 하는 말은 스포츠에서나 필요하다.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그래서 패배마저도 아름답다고 박수받는다. 스포츠에서는 2등에게도 상을 주지만 전쟁에서는 2등을 땅에 묻는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비겁하게' 적을 공격한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면 관객들은 마음 졸이지만 결국 주인공은 악당을 물리치고 살아남는다. 물론 영화속 이야기일 뿐이고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장수들, 투자하는 족족 돈을 버는 사람들, 이른바 고수들이다.

고수들에게는 정해진 틀이 없다. <오륜서>에서도 검술의 최고 고수는 '자세가 있되 자세가 없는' 이른바 '유구무구(有構無構)'의 단계라고 했다. 최고 경지의 전법에는 형태가 없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편한 바닷길을 두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했고, 제갈량은 일부러 불을 피워 적벽대전에서 패해 도망가던 조조를 유인했다. 때로는 투자정석이니 투자비법이니 하는 것은 정석도 아니고 비법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투자방법도 필요하다. 책에 나오는 틀에 박힌 투자비법은 새로운 맛이 없다. 어쩌면 개미들을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함정일 수 있다. 


전쟁의 역사는 '비겁의 역사'다. 비겁한 인간들이 비겁하게 만들어왔다.

그러기에 전쟁은 신중해야 한다.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친구가 한다고 섣불리 손 댈 일도 아니고, 동창이 돈벌었다고 즉흥적으로 객기를 부릴 일도 아니다. 전쟁은 즉흥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했으면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이길 자신이 없다면 시작하지도 말 일이다. 뻔히 질 줄 알면서도 객기를 부리는 것은 순간 '오빠! 멋져부러'는 될 수 있을 지언정 그것 뿐이다.


허나 싸움의 시작은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손자병법>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은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이다. 자신을 똑바로 보고,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곧 싸움의 시작이다. 아는 게 없으면서도 '난 실전 체질이다'라고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잘 할 수 있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패했다고 핑계대지 말고, 훼방꾼만 없었다면 이길 수 있었다는 해괴한 이유를 달지 마라. 묵묵히 와신상담하며 준비하는 '1만시간의 법칙'을 믿고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아우라를 완성하라. 자신이 완전체가 되었을 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상대를 마주할 수 있는 뿌듯함은 자신을 제대로 평가한 데 대한 보상이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전쟁에 나서겠다는 호기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적을 마주하는 용기를 혼동하지 않는게 싸움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이기는 게 아니라 지지 않을 준비가 됐을 뿐이다.

싸움에는 상대가 있다. 나만 준비했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순 없다. 이길 수 없다면 나대지 마라. 장렬한 죽음은 죽음일 뿐이고, 당당한 패배 역시 패배일 뿐이다. 지려고 싸움을 하는 사람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만 박살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속담일 뿐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싸움을 붙었으면 이겨야 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고, 공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총칼을 든 적에게 성경책을 들먹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때린데 또 때리고, 아픈데만 골라 때리고, 딴 데 볼 때 또 때리고, 안 때릴게 하면서 또 때리고, 악수하는 척하면서 또 때려야 한다. 치사하다고 비겁하다고 하지 마라. 싸움이란 원래 악랄하고 치사하고 비겁한 것이다. 또한 싸울 때는 길을 잘 살펴야 한다.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이 아니다. 평지가 있으면 산길도 있다. 친구들이 많이 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도중에 해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험한 산길도 있다. 그러니 길이라고 아무 길이나 가지 말 일이다. 평지도 못 걸으면서 언덕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

무엇이 됐던 혜성처럼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다. 구름이 모여 비를 만들어내듯 세사만사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 '한운불우(閑雲不雨)'라는 말이 있다. 빈 하늘을 떠도는 한가로운 구름은 결코 비를 만들 수 없다. 기본을 무시하거나 작은 일을 등한시하다가는 나중에 큰 코 다친다. 기본은 세세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누가 아파트에 투자하고 누가 땅에 투자하는지 잘 챙겨야 한다. 그러나 너무 자세히 들여다본다고 또 능사는 아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자세히 보되 객관화된 눈으로, 자신만의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한발 물러나 봐야 한다. 숲 속에서는 숲을 보지 못한다. 숲을 나와야 숲이 보인다. 자세히 볼 일이 있고 멀리 봐야 할 일이 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자세히 보지 못한다.


싸움은 반드시 적이 있다.

결국 나와 적의 실력이 승패를 가름한다. 그러나 싸움에는 나와 적 외에 '외부'라는 상황변수가 존재한다.


고양이 잡는 칼을 사자에게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얼굴 씻는데 낙동강물이 다 필요한 건 아니다.




싸움의 지형은 어떠한지, 지세는 어떤지, 날씨와 바람은 어떤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싸울 때는 이러한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싸움은 외부변수가 나에게 유리할 때 벌여야 한다. 외부 변수가 불리하면 유리할 때까지 기다리던지, 유리한 환경이 되도록 환경 자체를 바꾸든지 해서 나에게 유리한 환경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북서풍이 불 때는 남동풍을 기다리고, 적이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잘 보이는 산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내 능력을 파악하고, 적의 실력을 파악하고, 외부 변수까지 장악해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이 오면 물불 가리지 말고 몰아붙여야 한다. 시간을 끌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싸움을 시작해 놓고 생각이 많으면 일을 그르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임금이라도 밟고 넘어가야 한다.


<손자병법>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자는

'도대체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인간은 왜 싸우는가?'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손자가 내린 답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이익이 있는 곳에 싸움이 있다. 이익이 없으면 싸움도 없다. <한비자>에서도 "인간은 이익을 찾아 움직이는 동물이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기는 사랑도, 배려도, 인정도, 의리도 아니다. 오로지 이익뿐이다."라고 일갈 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도덕 운운하며 고상한 척 떠들어도 이익이 안 나는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충성심과 애사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던 직원들도 두 달만 제때 월급이 밀리면 욕지기를 하며 미련없이 짐을 싼다.

익이 나지 않는 기업에 사회적 책임이니, 기업철학이니, 기업문화니, 핵심가치가 어쩌고 비전이 저쩌고 해봐야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결코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된다. 싸움은 분풀이 대상이 아니라 이익을 챙기는 게임이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이익을 따져야 한다. 이익이 없는데 구태여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 싸움을 시작했다면 물불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했을 경우,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고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울 수도 없다.


그러나 결국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권한다.

피를 흘리지 말고 이기라는  것이다. 영화 <친구>의 "밟을 때는 쳐다만 봐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확실하게 밟아줘야 한데이. 그래야 다시는 개길 생각도 못한데이"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길 생각도 못하게', '싸울 생각도 못하게' 하는 것이 최고라는 의미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라는 신화를 갖고 있다. 이기는 싸움만 했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속담만 믿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의 비아냥거림을 감수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건 오히려 용기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이기는 싸움만 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도 싸우지 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