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올 봄에는 가뭄이 사라진 듯 자주 비가 내린다.
지금도 우당탕탕 봄 폭우가 창문을 두드린다.
강한 바람은 덤이다.
매연과 미세먼지에 찌든 나무들의 반란이다.
몸에 들러붙은 탁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함일게다.
이 또한 자연의 섭리다.
자연의 '자(自)'는 코를 본뜬 모양이라고 한다.
숨을 쉬는 모든 생명 활동이 곧 자연이라는 의미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과 같은 모든 창조행위에는 자연이 있다.
생명 활동과 창조 행위가 일치되는 지점에서 자연은 저절로 자유와 아름다움을 잉태한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시의 계절이다.
누구나 한 반쯤 시인이 되는 꿈을 꾸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초롱초롱한 언어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적당히 포기하고 살아갈 뿐이다.
아니다.
글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시심(詩心)이 없어서, 삶을 시처럼 정직하고 처연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단순한 언어의 장난질이 아니다.
세상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철저한 집중의 산물이다.
그래서 소설은 허구지만 시는 허구가 아니다.
지어낸 소설은 있지만 지어낸 시는 없다.
시는 진실한 삶에서만 가능하다.
한 시인이 초등학교 백일장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저학년이 쓴 단 세 줄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송아지의 눈은 크고 맑다.
그런데, 소고기국은 맛있다.
난 어떡하지?"
피카소는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는 자기 안의 어린이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 안의 어린이가 곧 자연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예술가적 기질을 잃어간다.
시적 감수성은 교육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희미해져 간다.
저학년이 고학년보다 창의력이 높고 학교이 좋고 성적이 좋을수록 창조작 글쓰기는 멀어져간다.
학원이나 과외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을수록 어른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글이 된다.
자신의 눈높이가 아닌 부모의 눈높이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감상할 때조차 학습중압감에 시달리는 어린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생들에게서 더 차원 높은 창조성을 확인하곤 한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동심을 잃고 어른들의 포로가 된 학생들이 말 잘 듣는 '학한 아이'가 되기 위해 학원 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듯 하나같이 표정들이 어둡다.
'부동산을 읽다 >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부동산은 지표가 아닌 심리다 (0) | 2019.01.09 |
---|---|
7.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한 명의 부자를 위해서는 10000명의 거지가 필요하다 (0) | 2019.01.08 |
5.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마키아벨리의 <군주론> (0) | 2017.12.15 |
4.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손자의 <손자병법> (0) | 2017.12.12 |
3.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칭기즈칸> (0) | 2017.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