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 역사 27

17. 한국 최초로 옥상 헬리포트를 설치한 아파트, 남산외인아파트(1972년)

힐탑아파트만으로는 몰려드는 외국인과 미8군 수요를 맞추기에 부족했던 정부는 본격적으로 외인아파트 공급에 나선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백70달러, 연간수출액도 5억 달러에 불과했다. 지하자원 하나없는 우리나라는 수출이 국가적 과제였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바이어 등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정작 이들이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아 힐탑아파트와 남산외인아파트를 짓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남산에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던 17층짜리 고층아파트가 등장했다. 힐탑아파트의 동생뻘인 남산외인아파트다. 풍광 좋은 남산기슭에 1970년 착공해 1972년 완공되었는데 면적은 92.5~115.7㎡(28~35평), 16~17층 규모의 2개동 아파트로 온수난방방식을 적용해 세대별..

16. 한국 최초의 외국인 전용 아파트, 힐탑아파트(1967년)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967년, 선진 건축 기술을 전수 받기 위해 정부와 기업들은 많은 외국인을 초청했다. 외국 기술자들은 경제발전에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최고 대우를 해 줘야 했다. 이들을 위한 음식과 옷은 수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거주할 집이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 호텔과 코리아나호텔 등에서 묵었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 직원과 상사 주재원은 살 집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탄생한 아파트가 서울 한남동 힐탑아파트다. 힐탑아파트는 일단 높이에서 압도했다. 이전까지 등장했던 아파트는 고작해야 5층을 넘지 않았다. 일본에서 만든 오티스Otis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옥상정원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나타났다..

15.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 세운상가아파트(1967년)

2018년 4월 6일 오전, 대기업 본사들이 밀집한 서울 세종로사거리를 지나 종로3가로 들어서자 빽빽하게 들어선 낡은 상가들이 나타났다. 그 사이로 지난해 9월 일부 리모델링을 마친 세운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모델링 했다는 세운상가 일부 건물 외관은 깨끗하게 정비돼 허름한 주변 건물과 대비됐다. 세운상가는 세운·청계·대림·진양 등 총 7개 동(棟)의 대형 상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세운상가 건설 당시에는 7개 상가의 2층에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로가 설치됐다. 2018.4.11. 세운상가는 1968년 준공한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강남의 타워팰리스보다 30년 더 빠른 셈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최첨단 고급 복합 타운. 다양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순..

14.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이별한다, 정동아파트(1965년)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가수 이문세가 부른 의 노랫말 일부이다. 1999년 서울시에서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을 뿐만 아니라 2006년에는‘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서울시 중구 정동길. 가을에는 낙엽을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하다. 싱글이든 연인이든 낙엽지는 가을이면 더 걷고 싶은 거리 서울 정동길, 100년이 넘은 건물들과 아름드리 가로수, 잘 정돈된 도로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늑하고 포근해서 산책로와 데이트 장소로 사랑받는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은 소담스럽고 정감 있는 역사의 길이자 연인들이 가장 걷고 싶은..

13. 한국 최초의 중앙정원형 아파트, 동대문아파트(1965년)

충정아파트와 함께 현존하는 서울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 충정아파트처럼 부서진 창틀이나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에 낡고 허름한 외형을 상상하며 다시 찾은 동대문아파트는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지하철 동묘역 7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높이 세워진 은행 건물 옆으로 겨자색과 녹두색 페인트로 전신 화장을 한 동대문아파트가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부스러진 외벽이 그대로 드러나 낡고 스산한 느낌을 물씬 풍겼지만, 보수공사를 통해 깔끔한 외모로 재탄생 했다. 동대문아파트는 1965년에 완성된 7층짜리 중앙정원형, 일명 중정형아파트다. 대한주택공사가 지었는데 초기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연예인아파트’라고 불..

12. 한국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 종암아파트(1957년)

미쿠니아파트가 탄생하고서 3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 손으로 직접 지은 아파트가 등장했다.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8년 11월, "서울 한복판에 명물이 등장했다"며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중앙산업에서 서울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학교 옆 언덕배기에 3개 동의 아파트를 지었는데 바로 종암아파트이다. 정식 명칭은 ‘종암아파트먼트하우스’였지만 이를 줄여서 종암아파트로 불렀다. 종암아파트는 해방 이후 최초로 ‘아파트먼트’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아파트이자 우리 기술로 최초의 아파트인 동시에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도입한 아파트이기도 하다. 종암아파트 낙성식 축사에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아파트에 있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니다"라면서 감격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침..

11. 한국 사람들은 왜 아파트홀릭Aptholic에 빠졌을까?

한국인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 1 국토종합개발 2 인그로이즘Ingroism 3 단일민족 4 수익성, 안전성, 환금성 5 전세제도와 선분양제 6 편리성 7 신분상승의 사다리 지혜를 사랑했던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M)는 “집은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 특성이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집은 신분상승의 보증수표가 된 지 오래다. 주로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에서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을 너머 사회적 계급의 표상이다. 또한 자산증식의 수단이자 부가가치창출의 원천이었다. 단순히 잠을 자..

9. 한국 영단주택의 효시, 조선주택영단(1943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영단 주택은 조선주택영단(Choseon Housing Administration, 일제 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설립된 특수법인으로 1962년 대한주택공사로 변경)에서 1943년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단주택이다.‘영단’이란, 국가의 정책에 따른 공익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정부와 민간인이 50% 정도씩 자본을 납입하여 설치하는 재단을 말한다.(한민족문화대백과) 조선주택영단은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으로서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주택공급에 본격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된 계기가 되어 6월 14일 총독부령 제23호로 조선주택영단령이 제정·공포되고, 같은 해 7월 1일자로 특수법인 조선주택영단이 창설되었다.심각한 주택난을 타개하고 주거에 관한 국민 생활의 향상·발전을 기할 목적으로 ..

10. 한국 최초로 PC공법으로 지어진 아파트, 한미재단주택(1956년)

한미재단주택은 미국의 대한원조기관의 하나인 한미재단(KAF)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1956년 서울 행촌동에 지은 주택이다. 한미재단은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J. A. 밴플리트 대장 등이 주도해 1952년 한국과 미국의 사업보건단체 및 유지들이 한국의 재건과 부흥을 위하여 설립한 민간 차원의 비영리 사설 원조기관이다. 전쟁으로 한국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미국의 기업과 일반 시민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한국 내의 고아원·의료기관·후생기관에 대한 원조를 활발히 벌였다. 경제·농업·주택·교육·보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활동을 벌여 미국 유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급, 학교 교사 건축용 자재 지원, 주택건설 지원, 나병·결핵 환자의 치료 및 영세민을 위한 병원 운영 자금 지원 등의 활동을 ..

3.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1962년)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는 ‘단지’ 개념의 새로운 아파트들이 등장했다. 1961년 5ㆍ16 군사 정변 세력은 '군사혁명의 생활혁명으로의 전환'이라는 모토 아래 대대적으로 시민아파트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그 시작으로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농장터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부유층 자제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포아파트를 계기로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붐이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 아파트의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거목적뿐만 아니라 투기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탄생한 것이 마포아파트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